누군가와 함께 사는 이유
남편과 연애를 시작했을 때, 내 나이는 스물일곱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무렵 소개팅 제안이 유독 많이 들어왔었다. 나보다 다섯 살만 많아도 서른셋. 소개팅 대상자의 나이는 30대 초중반으로 넓어졌고 프로필도 다양해졌다. 멀쩡히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뒤늦게 재수를 해서 1학년부터 다시 다닌 나와는 달리 똑똑한 내 친구들이 먼저 사회에 나가 번듯한 명함을 내미는 남자들을 돌아가며 소개해 주기 시작한 것이다. 나를 시집보내는 것이 그 해 미션이라던 패기 넘치는 친구도 있었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길게 연애한 적이 없었다. 직전의 연애는 고작 두 달만에 막을 내렸다. 그래서 연애를 시작하자마자 주변에 공표하기가 망설여졌다. 어느 정도 관계가 안정될 때까지 대외적으로는 ‘썸남’인 걸로 할 생각이었다.
결혼할 거 아니면 지금 헤어져
물론 소개팅 건수 중 몇 건은 욕심 반, 호기심 반으로 나가기도 했다. 그중 한 두 명과는 두어 차례 데이트도 했다. 그 시절 내 꿈은 ‘취집’이었다. 어디까지나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있도록 남편의 벌이가 든든하고, 시댁의 재력이 탄탄하길 바랐다. 그래서 누가 봐도 근사한 직업을 가졌거나 좋은 동네에 사는 사람은 일단 한 번 만나보았다. 이렇게 말하니까 내가 무슨 남자를 서른한 가지 아이스크림 고르듯 고른 것처럼 들리겠지만 나에게 들어온 소개팅 건수는 골라야 할 정도로 많았어도 그중 누군가와 연애를 시작했다면 얼마나 갔을까 싶기도 하다. 처음 남편을 만났을 때는 착하기만 한 쉬운 남자라고 생각했다. 밀당이라는 것 없이 생각하는 것이 투명하게 보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날름 내 뒷주머니에 차 두고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만날수록 헤어지는 발걸음에 마치 은행을 밟은 듯 쿰쿰한 기분이 들었다. 양심 바른 스타일도 아닌데 이런 기분이 드는 게 괜히 멋쩍어 결국 내 입 밖으로 아무 말이 튀어나왔다.
“오빠, 나랑 결혼할 거 아니면 지금 그만둬. 나 요즘 소개팅 엄청 많이 들어와.”
고작 두 달 만난 여자가 이런 말을 했으니 어쩌면 결혼에 갈급한 것처럼 비쳤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나는 결혼 자체를 종용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 거기에는 ‘결혼을 감수(?)할 정도의 마음이 아니라면 죄책감 가질 필요 없겠지’라는 내가 만든 면죄부가 숨어 있었다. 만약 그가 ‘그게 무슨 생뚱맞은 소리냐’라는 반응을 보이면 나중에라도 ‘결혼 생각 있다는 남자는 어떤가 싶어 만나봤다’고 변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음, 하면 되지? 하자.”
뭐라고? 얄팍한 낚싯대를 어설프게 휘둘러댔는데 훅 낚여서 되려 당황한 건 나였다. 신기한 건 그의 말이 이 상황을 모면하려 하거나 순간의 감성에 젖어 던진 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결혼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지도 않은 듯했다. 어쨌거나 그런 대답을 들은 이상 더 이상 마음속 핑계가 유효하지 않았다. 그날을 기점으로 나는 소개팅 시장에서 셔터를 내렸다. 그리고 이 연애에 집중하기 시작하자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그에게 빠져들었다. 내 스타일 아닌데, 내가 바라는 조건도 아닌데, 세련되거나 특별히 재밌지도 않은데 말이다.
지금 헤어질 거 아니면 결혼해
연애한 지 2년쯤 되었던 어느 날, 이색 데이트를 하는 기분으로 웨딩홀을 구경했다. 친구의 친한 언니가 웨딩플래너라기에 재미 삼아 상담이나 받아볼까 하며 얼떨결에 스드메 견적까지 알아보았다. 그것이 결혼 준비의 시작이었다. 우리 멋대로 결혼 날짜를 잡고 식장을 예약한 뒤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아직도 그때 엄마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이 떠오른다.
“식 두 달 전까지 신혼집 마련하면 결혼을 허락해주마.”
남은 시간은 석 달이었다. 그의 사정을 뻔히 아는 엄마로서는 좋은 핑곗거리였다. 그가 자취하는 집 전세금과 모아둔 돈을 합치면 1억쯤 되었는데, 서울 내 아파트를 구하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나 역시 직장생활을 늦게 시작해 모아둔 돈이 거의 없었다. 거기다 대학생활 중 3년을 수지에서 강북까지 통학했던 나는 광역교통에 질려 경기도에는 다시는 살고 싶지 않다고 선언했다. 반면 그는 자취생활에 질려 쾌적한 보금자리를 갖고 싶어 했다. 타협점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새에 어느덧 약속한 날짜가 되었다.
“당장 식장 예약 취소해라. 집도 없이 뭘 어쩌겠다고.”
엄마는 단호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한 보 물러설 때임을 알았다. 다급한 마음에 지금 당장 식장을 취소해야겠다고 그에게 통보했다. 그래도 아직 두 달이 남았으니 그때까지 좀 더 알아보자는 그의 설득에도 나는 등을 돌렸다. 그렇게 우리의 결혼은 기약 없이 보류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좌절했고 상처 받았다. 우리 엄마에게 서운한 마음보다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않고 엄마의 말 한마디에 식장을 취소해버린 나를 원망했다. 그 후로 몇 달간 우리의 연애는 위태로웠다. 생전 그런 적 없던 그가 약속 시간에 늦고 내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마음이 방황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나는 초조해졌다. 나 역시 결혼에 대한 확신이 흔들린 상태였으나 일단 잡아놓고 생각하자는 심산으로 초강수를 두었다. 내가 앞으로 우리 관계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할 것인지 문서로 정리해 프레젠테이션을 한 것이다.
- 앞으로 누구의 말보다 오빠의 말에 더 귀 기울일 것
- 부모님의 의견에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을 것
- 오빠의 가족도 내 가족처럼 존중할 것
자주 가던 카페에서 오랜만에 만난 날, 나는 결혼 서약서를 읽기도 전에 그보다 훨씬 더 비장하게 연애 서약서를 읽어 내려갔다.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일순 익살스럽게 요동쳤다. 풉!!! 결국 그는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야, 그만해. 그만해. 웃겨 죽겠다고... 내가 잘못했어. 다 내가 잘못했다."
그렇게 우리의 냉전은 종결되었고, 엄마의 기대(?)와는 다르게 다시 결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훗날 엄마에게 들은 얘기인데, 그때 내가 자신의 조건을 수용하고 군말 없이 식장을 취소한 것이 자신의 화를 누그러뜨린 결정타였다고 했다. 남편에게도 그때 정말 나와 헤어질 심산이었냐고 물어봤더니 킥킥대며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그럴 리가. 그냥 니 버릇 좀 고칠 기회라는 생각은 들더라."
하긴. 남편 성격에 아니다 싶었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끝내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의 처절했던 서약서가 좀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나에게도 남편에게 밝히지 않은 혼자만의 번뇌가 있었다. 결혼식 날짜가 다가올수록 이렇게 결혼을 해버리는 게 맞는 것인지 갈팡질팡했기 때문이다. 얼마 안 가 엄마 말대로 결혼생활의 환상은 산산조각 나고 결국 후회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나의 흔들림을 귀신같이 눈치챈 엄마는 결혼식 전날 밤, 내 방에 들어와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엄마는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말해도 상관없어. 지금이라도 아니다 싶으면 내일 식장에 가지 말자."
내가 식장에 들어간 것은 결혼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내가 3년 전 그에게 했던 질문이 부메랑처럼 나에게 돌아와 꽂혔기 때문이었다. '결혼할 거 아니면 헤어져'라고 그가 똑같이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결혼은 모르겠지만 헤어지진 못하겠다'라고 대답할 것 같다. 그래. 지금 헤어질 수 없다면 그냥 결혼해버리자. 헤어질 수 있을 때 헤어지면 되지! 요즘 세상에 이혼이 별 건가? 라며 무책임한 결론을 내버리자 이상하게 마음이 평온해졌다.
결혼하고 나서도 나는 이런저런 핑계로 혼인신고를 미뤘다. 쉬는 날만 되면 혼인신고하러 가자고 보채는 남편에게 '오빠,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1년은 살아보고 하는 게 낫지 않아?'라고 말했다가 제대로 한 방 먹었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밖에 안된다면 지금 그만두자."
그렇게 우리는 결혼 6개월 만에 혼인신고를 했다. 함께 작성한 혼인신고서를 들고 해맑게 웃으며 인증 사진을 찍는 남편을 보며 '그래, 나만 코 끼는 게 아니라 너도 그렇네'라고 생각하자 심각할 것도 없어졌다. 생각해보면 내가 유부녀가 되는 과정은 시작부터 끝까지 '될 대로 돼라'였던 것 같다. 하지만 때로는 되는 대로 따라가는 것도 필요한 법이다. 특히 나처럼 우유부단한 사람에게는.
모든 과정에 내가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맡길 수 있도록 큰 물살을 만들어준 남편에게 고맙다. 오늘도 나는 헤어지지 못해 남편과 함께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