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다기린 Feb 12. 2019

파리에 가려고 결혼한 사람

그리고 결혼이 내게 준 진짜 선물


결혼할 당시 친구들은 우스갯소리로 “너 파리 가려고 결혼하는 거잖아”라고 말하곤 했다.


세상 나만 귀한 딸인 양 엄격한 통금과 외박금지를 예외 한 번 없이 적용하시는 부모님 때문에 여행은 상상할 수 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 내게 첫 해외 경험은 2009년 파리에서 보낸 두 달 간의 인턴십이었다. 그나마도 파리에서 유학 중인 엄마 지인의 딸이 잠시 비우게 된 집에 지낼 수 있게 되면서 소속과 동선이 투명해지자 가능했던 일이었다.


약도 없는 불치병

배낭여행의 낭만을 느끼기도 전에 ‘살아보기’의 진가를 체험하게 된 나는 그야말로 ‘파리병’에 걸리고 말았다. 매일 아침 파리지앵들과 함께 출근길 전철에서 내려 회사 앞 빵집에서 갓 구운 크로와상을 샀다. 평소에 빵이나 디저트를 그렇게 즐기는 편이 아니지만 파리에서라면 아침으로 꼭 빵을 먹어야할 것 같았다. 파리의 빵집들에서는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치명적인 버터향이 새어나왔다. 특히 크로와상은 처음부터 손을 버릴 각오를 하고 양손을 활용해 쭈욱 찢어 먹어야한다. 압력밥솥을 열었을 때 풍기는 갓지은 밥냄새처럼 뜨끈하게 고소한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때문이다.  


파리 1구 Pyramid역의 고풍스럽고 럭셔리한 건물에 자리한 사무실은 그 자체로 가장 파리다운 모습이었다. 사무실 내부로 연결된 엘리베이터가 있었지만 나는 주로 계단을 이용했는데, 천장에 매달린 근사한 샹들리에를 보며 삐걱대는 나무 계단에 깔린 카펫을 밟는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한 시간 반이나 되는 점심시간에는 간단하게 샌드위치를 먹고 오페라 가르니에 앞 계단에 앉아 버스킹을 감상하거나 루브르 앞 튈르리 정원을 산책했다. 종종걸음으로 바쁘게 오가는 관광객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우쭐하기도 했다. ‘나는 내일도, 모레도 여기에 있을 거야. 부럽지?’ 라며. 지금이야 SNS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게 되면서 한도시에서 여유있는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내가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퇴근 후에는 야간개장을 하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았다. 루브르 박물관은 연간회원권을 끊어 시간이 될 때마다 갔다. 가이드 투어를 통해 주요작품만 골라 보아도 최소 4시간은 걸리는 규모의 전시를 하루에 한 섹션 씩 차근차근 볼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는 회화관에는 17세기 플랑드르 화가들의 작품이 굉장히 많다. 섬세하고 치밀한 묘사의 풍경화와 정물화를 관찰하다 보면 어느덧 폐관 시간이 다가온다. 퇴관을 재촉하는 안내방송에 쫓겨 밖으로 나오면, 그 자체로 또 하나의 회화 같은 파리의 야경이 늘어서 있었다.


어떤 날은 집주인 언니의 소개로 알게 된 파리 유학생들과 그들의 프랑스인 친구의 집에 초대를 받기도 했다. 그들이 즐겨 먹는 진짜 ‘프랑스 가정식’을 맛볼수 있었고, 함께 한식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더듬더듬 나누는 대화였지만 대화 주제는 놀랍도록 폭넓었다. 정말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가 갑자기 철학적 토론이 되기도 하고, 다른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편견없이 공유되는 식탁에서 나는 왜 이들이 식사 시간을 그렇게 길게 할애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신선하고 즐거운 대화는 늘 나의 막차 시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또한 파리에서 지내며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중 하나가 장 보는 일이었다. 신선한 식재료가 얼마나 저렴한지, 푸딩과 아이스크림의 종류는 어쩌면 그렇게 다양한지 장바구니에 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마트에만 가면 한 시간은 훌쩍 지나곤 했다. 프랑스에서는 육류를 냉동해서 유통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특별한 조리 없이 그냥 굽기만 해도 근사한 스테이크가 되었다.


'파리는 매일이 축제’라는 말이 실감 나는 나날들이었다.


again, and again Paris!

그런 내게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파리를 다시 찾고 싶은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주말과 공휴일, 신혼여행 인정 휴가 5일을 다 합치고 개인 연차까지 붙여 최대 2주일을 빼놓았기 때문에(사실 이렇게까지 긴 휴가를 쓴 것은 우리 회사에서 전례가 없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신혼여행지는 일말의 고민 없이 파리로 정했다. 휴양지는 1주일만 다녀와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그쯤이야 결혼 후 언제든지 갈 수 있을 거라는 셈도 있었다. 미대를 나온 남편이 유럽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는 점도 큰 동기가 되었다. 이렇듯 나에게는 정말 모든 면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지였건만, 주변 사람들은 4년 내내 파리 앓이를 하던 내가 다시 파리에 가고 싶어 결혼을 하는 거라고 놀렸다. 시답잖은 사람이 된 것 같아 찜찜했지만 결혼식 당일, 그 말이 어느 정도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났다. 신부 입장을 하기 직전까지 바짝 긴장하고 있던 내가 주례사를 듣는 내내 앞으로의 결혼생활이 아닌 당장 내일 파리로 출발한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다음날, 공항으로 출발하던 기분을 잊을 수 없다. 4년 만의 파리였고, 4년 만의 비행이었고, 남편과의 첫 여행이었다. 신혼여행은 동남아 휴양지로 짧게 다녀오고 초기 생활비를 여유 있게 만들어두는 것이 어떠냐는 엄마의 조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프랑스로 13박 14일 꽉 채워 떠나는 길에는 그 어떤 후회와 걱정도 없었다. 오로지 설렘만 있을 뿐이었다. 파리에서의 첫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남편이 상기된 표정으로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뭐해?”

“있잖아. 창 밖을 좀 내려다봐봐.”


아직 해가 뜨지 않은 푸르스름한 새벽하늘과 나란히 맞닿은 파란 지붕들. 그리고 그 아래 가로등의 노란빛이 멍울지는 좁은 도로. 그 도로를 걷고 싶다며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나섰던 남편은 한참 뒤에 그날의 첫 구운 크로와상을 사서 돌아왔다. 그날 숙소에서 함께 먹은 커피와 크로와상은 4년 전 사무실에서 먹었던 그것보다 더 맛있었다. 그래, 역시 파리에 오길 잘했어. 당분간 다시 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이후의 모든 일정을 순간순간 더 풍부하게 느끼려고 애썼지만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앞으로도 매년, 파리에 오게 될 것이라고는.


결혼과 동시에 언제든지 어디로든 떠날 수 있게 되었고, 기회가 될 때마다 나는 파리로 향했다. 돈이 많아서는 아니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자동차도 없다. 신혼집은 인테리어 공사도 하지 않고 체리색 몰딩을 참으며 지금까지 지내고 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순간의 감성, 추억의 곱씹음, 온전한 자유로움의 느낌이었다. 그리고 참 고맙게도 남편은 나의 가치관을 늘 지지해주었다. 남편이 신혼초에 내게 해주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결혼했다고 해서 무언가를 못하게 된다고 생각하지 마. 네가 하고 싶은 것은 다 할 수 있어. 결혼했다는 사실이 너에게 제약이 된다면 내가 슬플 것 같아.”


파리가 내 인생에서 처음 맛보는 자유로의 일탈이었다면, 결혼은 내 인생에서 평생 누리게 될 자유의 일상이다.


그렇게 나는 파리에서 느꼈던 자유를 비로소 내 것으로 소유하게 되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