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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기린 May 29. 2019

엄마보다 잘나서 뭐해

부족한 엄마의 모자란 딸



“너는 내가 싫어서, 도망치려고 결혼하는 거지?”


자못 진지한 엄마의 물음에 울컥 화가 났다. 엄마가 본인에 대한 연민을 자극하는 것이 나에게 가장 효과적인 공격임을 알고 있는 듯해서, 내 사랑에 대한 확신을 그저 도피의 도구로 폄하한 듯해서 속에서 천불이 끓었다. 하지만 간신히 마음을 누르고 나긋하게 되물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엄마 마음은 편해?”


나도 이만큼 했는데

엄마는 평생 아빠가 벌어다 주는 월급만으로 살림을 키워왔다. 경기도 부천의 다세대 주택 신혼집에서 8년을 지내며 집 값의 70프로가 넘었던 대출을 다 갚아냈다. 그렇게 빚을 털어낸 엄마는 아파트에 살아보고 싶다는 욕심으로 안산의 30평대 신축 아파트를 매입했다. 서울 삼성역에 있는 아빠의 사무실까지 출퇴근 사정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지만 한 번도 혼자 대중교통으로 서울에 나가본 일 없는 엄마에게는 그저 깨끗하고 넓고 세련된 아파트가 생겼다는 뿌듯함이 최고였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그때 우리 가족은 종종 넓은 베란다에서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화로에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남들의 시야가 미치지 않는 공간인데 살짝 야외에 나온 분위기도 나면서 거실 쪽 문을 닫아두면 집 안으로는 냄새가 베어 들지 않으니 우리만의 소박한 피크닉을 즐기기에 최적의 공간이었다.


동생이랑 단지 내 잘 다듬어진 보도블록을 휘휘 가로지르며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것도 신나는 일이었다. 공부하는 방, 잠자는 방이 따로 있었고, 널찍한 주방은 요리 솜씨 좋은 엄마의 재능을 펼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우리에게 꼭 맞춘 듯한 집이 되어주었던 그 아파트가 한순간에 초라해지는 사건이 있었다. 신문 지면 광고에서 잠실의 다 쓰러져가는 13평짜리 아파트가 우리 집 보다 비싸게 팔리고 있는 것을 엄마가 보고 만 것이다. 엄마는 그때 그게 그렇게 자존심이 상했다고 한다. 자기가 이 아파트를 선택한 탁월한 결정에 도취되어 있는 사이, 서울 것들은 그깟 아파트 우리에게는 20년 넘은 13평짜리 아파트 가격도 안된다며 비웃는 듯 느껴졌다. 그 길로 엄마는 우리 집을 부동산에 내놓았다.


이후로 엄마의 부동산 투자는 실패한 일이 없었다. 덕분에 우리는 잠실 아파트가 재건축하는 동안 신도시인 수지에 또 한 채의 아파트를 장만해 그곳에서 살았고, 경기도 광주에 전원주택을 지을 부지도 사들였다.


엄마는 결혼 후 쭉 전업주부로 지냈지만 절대 허투루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늘 좋은 동네에서 쾌적한 환경을 누리며 살았지만 그게 곧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일례로 결혼 2년 차에 엄마로부터 이런 질문을 들었다.


“그래서, 이제 한 5천 정도 모았니?”


내가 너의 힘이 되어줄게

엄마가 예비사위의 자격요건으로 가장 먼저 궁금해했던 것은 다름 아닌 ‘부동산’이었다. ‘남자는 결혼할 때 집을 마련해와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남들보다 강했고, 외벌이로 딸만 둘 키우며 부동산을 여러 개 갖추어 놓은 경험을 잣대삼아 아들 키우는 집은 응당 아들 앞으로 집을 구해놓았을 것이라는 가정을 세웠다. 딸과 결혼하겠다고 인사 온 서른 살의 남자가 본인이 살고 있는 반지하 빌라 전세금 말고는 아무 밑천이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엄마는 이미 마음의 선을 그어버렸다.


그렇게 집도 없는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딸에게 엄마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은 시댁으로부터 받을 게 없다면 나도 너에게 줄 게 없다는 협박이었다. 엄마 재산은 애당초 물려받을 욕심이 없었다고 대답하자 이제 엄마가 할 수 있는 것은 감정적 공격이었다.


“너는 내가 싫어서, 도망치려고 결혼하는 거지? 결혼하지 않고 살면 더 좋은 집에서 더 편하게 살 텐데 네 발로 고생길에 들어서려고 하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


내가 이 남자가 결혼하고 싶을 만큼 좋은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지만 경제적 단위로 환산할 수 있는 가치는 아무것도 없었다.


엄마는 처녀시절에 집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외할머니 혼자 삼남매를 키우는 환경에서 엄마는 외할머니를 도와 가계를 책임지는 실질적인 동반 가장이었다. 18살 차이 나는 첫째 언니는 일찍이 시집을 가고, 공부 잘하는 둘째 오빠는 대학교를 다니고 있는 상황에서 엄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공장에 취직해 매달 월급을 고스란히 외할머니께 가져다 드렸다고 한다. 혼자 시를 쓰기도 하고 책 읽기를 좋아하던 감수성 풍부한 소녀에게 그런 각박한 환경은 숨이 막힐 법도 했다. 그래서 서울에서 대학교를 나오고 대기업에 막 취직한 아빠와 감정이 싹텄을 때 큰 고민 없이 아빠와 결혼해 서울로 가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나는 친정이 정말 볼 것 없었잖아. 그런 나는 누굴 재고 따지고 할 형편이 못 되었어. 하지만 너는 달라. 이렇게 멀쩡한 친정을 만들어 주었는데 왜 좀 더 콧대 높이 굴지 못하는 거니?”


엄마는 알았을까? 엄마 덕분에 부족한 것 없이 자라 구김살 없는 성격을 갖게 된 것이 안정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고 그것이야말로 엄마가 내게 준 최고의 선물인 것을.


사랑에 ‘힘’은 필요 없어

다른 선택지를 탐구할 새 없이 덜컥 시집온 것 치고는 엄마의 결혼생활은 평탄했다. 아빠와의 성향 차이 때문에 정서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도 알고, 우리를 키우면서 본인은 돌보지 않았다는 것도 알지만 그게 엄마 인생 전체를 실패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평범한 결혼 자체의 리스크일 뿐이었다.


엄마가 반대하는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나는 한 번도 부부싸움을 하거나 남편에 대한 불만이 있을 때 엄마에게 공유한 적이 없다. 다행히도 나쁠 때보다는 좋을 때가 더 많았고 수년을 옆에서 지켜보던 엄마도 이제는 사위를 바라보는 눈빛에 가끔 짙은 애정이 느껴진다. 물론 그런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자존심 상한다는 듯 곧 새침한 태도로 돌아서긴 하지만.


아무리 물려받을 재산이 있고, 부모님의 노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보장이 있더라도 시댁과 마찬가지로 친정도 우리의 살림에 실질적인 보탬은 주신 적이 없다. 오히려 남편이 꾸준히 본인의 커리어를 업그레이드하면서 안정적으로 수입을 벌어오고, 심지어 작년부터는 외벌이로 가정을 케어하고 있으니 내 입장에서는 손해보다 득이 많은 결혼생활이다. 남편 역시 처가에 기대하는 게 없다. 때로는 처가 재산을 욕심 내서라도 나에게 저자세이길 바라기도 하는데 정말 한결같이 그런 조건은 배제하는 남편에게 되려 서운할 정도다.


“요즘 세상에 처가에 있는 재산은 두 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다 쓰시고 남는 게 없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야. 그런 걸 바라서도 안 되지만 앞으로 점점 바랄 수도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어. 그러니까 너도 엄마에게 뭔가 받겠다는 마음은 접어둬.”


나는 남편이 엄마가 나를 위해 준비해 둔 ‘힘’ 때문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나를 ‘사랑하는 힘’으로 버틴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내 기준에서 나는 이미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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