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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기린 Mar 01. 2019

시댁의 끝에서 아주버님을 외치다

형만 한 아우 없다더니


결혼을 미룬 후, 다시 결혼 준비를 시작했을 때 누구보다도 남편을 말렸던 사람이 바로 아주버님이었다. 예비 신부와 예비 장모님 모두 쉽지 않은 상대 같으니 결국 결혼에 성공하더라도 마음고생하며 살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평소 존경하고 따르는 형의 말이었지만 역시 남자는 우애보다 사랑인가 보다. 남편은 나와의 결혼을 감행(?)했고, 아주버님은 우리의 결혼식에서 축사를 해주게 되었다.


엄마와 어머니

무뚝뚝한 형이 진심을 담아 쓴 축사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울 만큼 따뜻했다. 투박한 말투로 건조하게 읽어 내려가는 문장이었지만 그 내용은 동생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메이크업을 수정하기 위해 내 옆으로 다가온 이모님에게 남편이 속삭였다.


“저도 좀...”


스크린에 그대로 비친 남편의 입모양을 보고 하객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힐끗 보니 남편은 형의 축사를 들으며 눈물을 뚝뚝 흘린 모양이다.


남편은 평소에도 자기 감정을 잘 표현하는 스타일인 반면, 아주버님은 그렇지 않다. 남편이 “형님아, 형님아” 부르면서 계속 말을 시키면 썰렁한 농담으로 대화의 맥을 끊기도 하고, 조카들 칭찬을 하면 “그 나이엔 다들 그 정도 한다”라고 머쓱해한다. 그런 아주버님이 동생에게 이렇게 진지하게 속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 결혼식을 직접 준비하면서 내 친구에게뿐 아니라 아주버님께도 축사를 부탁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모로 남편과 아주버님은 참 스타일이 다르다. 남편은 어머니한테도 “엄마”라고 부르며 살갑게 대한다. 소위 말하는 ‘딸 같은 아들’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통화로 일상다반사를 공유하고 어머님과 단 둘이 외가댁이 있는 부산에 여행 겸 다녀오기도 한다. 그런 남편에게는 어머님도 속 얘기를 많이 하시는 편이다. 하지만 아주버님은 어머님을 깎듯이 ‘어머니’라고 부르며 장남 역할을 톡톡히 한다. 어머님 댁에 텔레비전이 고장 나면 슬쩍 바꿔주시는 것도, 때때로 두둑하게 용돈을 챙겨 드리는 것도 아주버님 몫이다.


시아버지의 빈자리

아버님이 연이어 사업에 실패하시면서 실질적인 가장이었던 어머님은 아들 둘을 살뜰하게 케어할 여력이 없으셨다. 형제는 단 둘이 남은 집에서 매일 중국집 음식과 치킨을 번갈아 시켜 먹으며 엄마를 기다렸다. 남편이 대학생이 되었을 때, 어머님과 아버님은 결국 헤어지셨고, 아주버님은 일본으로 박사과정 유학을 떠났다. 미술을 전공한 남편은 아버님을 보면서 남자가 경제력이 없으면 가정을 지킬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대학 졸업 후 서울에 올라와 UX 디자인을 전공하면서 새롭게 미래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아주버님도 남편도 어머님께 손 벌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장학금을 받아 공부했다.


남들 하는 사교육은 한 번씩 다 시켜보고, 딸이 재수와 휴학을 거치면서 대학을 두 번은 보낼 만큼의 등록금을 대고, 부족하지 않게 용돈을 챙겨주면서도 옷이며 신발이며 모두 사줬던 우리 엄마를 생각하면 자식 농사 참 본전도 못 찾았다 싶을 때가 있다. 그렇게 뒷바라지 한 큰 딸은 남들에게 회사 이름 대신 어떤 일을 하는지 구구절절 설명해야 알아듣는 중소기업에 취직했는데, 옆에 끼고 앉아 학습지 한 번 같이 풀어준 적 없는 어머님의 두 아들들은 스스로 너무나도 잘 알아서 번듯한 직장에 들어갔다.


그래서 나는 시어머니가 얄미웠었다. 못되게도 ‘무슨 복을 타고나서 해 준 것도 없이 아들 둘이 저렇게 자기 힘으로 잘 컸나’라고 생각했다. 아마 나는 그런 마음 때문에 신혼 초까지도 어머님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더 곡해해서 받아들인 것인지도 모른다.


어머니, 그건 아니잖아요

결혼 전 어머님께서 이제 결혼하고 나면 남편과 함께 교회에 다니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남편 역시 나처럼 종교를 믿지 않는 상태였는데, 결혼을 계기로 일타쌍피(?)를  노리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가족의 화합을 명목으로 한 거짓 믿음은 가질 수가 없었다. 뭐든 한 번 시작하면 대충 할 수 없는 내 성미에 마음이 동하지 않는데 ‘일단 한 번 해보자’는 것은 맞지 않았다. 예비 시어머니의 권유에 대놓고 싫다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답답함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어머님은 그런 내 모습에 적잖이 놀라셨는지 손사래를 치면서 말씀하셨다.


“아이고, 아니다. 안 해도 된다. 울지 마라. 내가 미안하다.”


그날 어머님과 헤어지고 나는 남편에게 확답을 받았다. 다시는 어머님께서 나에게 종교를 강요하지 않으시도록 철저히 방어해 줄 것을.


남편의 약속이 시험대에 오를 일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직후, 어머님의 외가 식구분들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해 부산에 내려갔을 때의 일이다. 어르신들이 다 모인 남편의 외할머니 댁에서 ‘공식 일정’을 모두 마친 뒤 따로 숙소를 잡아 하룻밤 잔 다음날이었다. 아침 일찍 어머님으로부터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응? 지금? 우리 이제 일어났는데... 잠시만.”


남편은 수화기를 손으로 막더니 나에게 물어왔다.


“엄마가 형네랑 형수 부모님이랑 다 같이 교회 가신다고 우리도 같이 가자고 하는데?”


아주버님과 형님은 대학교 캠퍼스 커플로 두 분 다 본거지가 부산이기 때문에 형님의 친정도 부산에 있다. 게다가 형님네도 온 식구가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일요일 아침의 이 상황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아주버님은 기독교를 믿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거부감도 없기 때문에 가족과 함께 할 때는 교회에 나가기도 하는 상태였다. 남편 역시 온 식구가 좋은 마음으로 단합하는데 초를 치기 싫은 마음이 앞선 듯했다. 하지만 나는 타협할 수 없었다. 내가 남편에게 결혼 전에 강력하게 요구했던 사항이기도 했으므로 여기서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따라 앞으로의 결혼생활에서 다른 시험이 다가올 때 내가 믿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가 판가름 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빠, 우리가 결혼 전에 얘기한 거 잊었어?”

“이번 한 번만 같이 가주면 안 될까? 앞으로 이럴 일도 아마 다시는 없을 거야.”

“난 절대 못 가. 가려거든 오빠 혼자 가.”


남편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어머님께 아무래도 못 갈 것 같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이미 ‘잠시만, 물어볼게’라고 하고 통화를 중단했다는 것 자체가 본인은 동의하지만 내가 반대할 수도 있다는 뜻 아닌가? 이걸 눈치채지 못할 만큼 둔한 여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어머님의 격양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새어 나왔다.


“너넨 어쩜 그렇게 한 번을 그냥 말을 듣는 법이 없니?”


전화를 끊고 남편은 그야말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아마 속으로는 내가 많이 야속했을 것이다. 당장 기독교 신자가 되라는 것도 아니고, 한 번 교회에 가서 앉아있기만 하면 되는데 왜 그걸 싫다고 해서 이렇게 분란을 만드나 이해가 안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엄마 눈치를 많이 보는 소심한 딸이기에 그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특히 남편은 딸만큼이나 엄마와 감정적 유착이 강한 아들이니까. 하지만 눈 질끈 감고 같이 가야 하나 생각하면서도 영 내키지가 않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다시 남편의 전화가 울렸다.


“아, 형님아. 아.. 진짜가? 알았다. 아이다. 고맙다.”


또 어머님인 줄 알고 심장이 철렁했는데 예상외로 아주버님의 전화였다. 통화를 하며 남편의 상기되었던 표정이 풀리고 안도의 옅은 미소가 번졌다. 어떻게 된 거지?


“엄마가 형한테 우리가 교회 안 간다고 했다고 뭐라고 했나 봐. 근데 형이 엄마한테 ‘어머니, 그건 아니죠. 제수씨는 종교도 없는 사람인데 교회에 와서 그냥 앉아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어제 서울에서 부산까지 내려와서 어른들 한꺼번에 뵙고 피곤할 텐데 좀 더 쉬다가 점심시간 맞춰서 식당으로 오라고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라고 했대.”


열 시아버지 안 부러운 아주버님

그날 점심을 먹으러 가면서 내내 마음이 불편했지만 다행히도 분위기는 괜찮았다. 그때 내 눈에 아주버님이 얼마나 멋져 보였는지 모른다. 장인 장모님까지 모두 계신 자리에서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가고 나에게도 간간히 말을 걸어주며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어가는 모습에서 속 깊은 배려가 느껴졌다.


어머님 역시 즉흥적이고 다혈질이시긴 하지만 뒤끝도 없으신 분이다. 원래 부산에서는 회를 이렇게 큼지막하게 썰어서 막장에 찍어 먹는다며 내 앞접시에 손수 가장 맛있는 부위를 놓아주시기도 했다. 어머님에게도 큰아들은 감정을 앞세워 대하기 어려운 존재인 듯했다. 작은 아들과 다르게 어떤 문제를 판단할 때 조언을 구하기도 하는 상대였다. 우리집에서도 보면 아빠가 엄마랑 싸웠을 때, 고민 상담을 하는 상대는 늘 큰딸인 나다. 평소에는 별 속 얘기를 하지 않다가도 뭔가 상의해야 할 일이 생기면 동생이 아닌 나를 찾는다. 동생은 아빠에게 마냥 귀엽기만 한 딸내미일 뿐이고 나는 약간 세컨드 와이프 같은 느낌이다. 아마 어머님께도 큰아들과 작은아들이 그런 느낌인가 보다.


그날 이후로 나 또한 시댁 행사에 대해 논의할 일이 있거나 남편과 싸우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를 때면 아주버님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시시콜콜 아주버님과 내통(?)하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내가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어떻게 하는 게 현명한 지 스스로 판단할 수 없을 때는 주저 없이 아주버님께 S.O.S를 친다. 사실 그럴 때마다 아주버님의 대답은 굉장히 짧고 명료하다. 하지만 나는 안다. 아주버님이 이런 상황에서만큼은 유일하게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임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에 대해 함부로 판단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수원에 살며 수원에서 직장을 다니는 아주버님이 가끔 외근으로 서울에 나오실 때면 남편과 함께 셋이서 저녁을 먹기도 한다. 그럴 때 나도 모르게 남편에게 쌓였던 감정을 유머로 포장해 이르게 되는데, 아주버님 특유의 썰렁한 개그가 희한하게 위안이 된다.


“두 사람은 아직도 그렇게 사랑합니까. 싸움도 애정이 있어야 하는 건데 대단합니다?”


아주버님의 축사는 결혼식 날 단 한 번뿐이었지만 아주버님의 존재 자체는 나에게 결혼 생활 내내 정신적 지지가 되어주고 있다. 가끔 내가 아주버님 칭찬을 하며 남편과 비교하면 남편은 입이 샐쭉 나와서 툴툴거린다.


“그렇지만 형은 머리숱도 나보다 없고 경제권도 형수한테 안 넘긴단 말이야. 그렇게 따지면 내가 더 낫지 않아?”


“으이구. 형 만한 아우 없다더니. 별 걸 다 질투해. 오빤 아주버님 따라가려면 멀었어.”


그렇게 핀잔을 주면서도 생각한다. 어머님이 두 아들을 방임하며 키웠다고 생각한 내가 틀렸다고. 어머님이 늘 아낌없이 두 아들의 결정을 응원하고 두 아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셨기에 지금의 두 사람이 있는 것이라고.


어머님의 마음을 채워주려 하는 만큼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노력하는 남편도, 어머님의 안위를 책임지려는 마음으로 새 식구인 제수씨의 평화를 지켜주려 노력하는 아주버님도 모두 소중한 내 가족이다.


고집 센 며느리를 예쁘게 봐주시고, 두 아들에게 그랬듯이 내 의견을 존중해주시는 어머님께도 늘 감사하다. 며느리가 직장을 그만두고 세 달 가까이 유럽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도, 아들 걱정을 하시기보다 인생에 이런 기회가 자주 있지 않다며 마음껏 즐기고 오라고 응원해주신 분이다.


이제는 남편이 우유부단할 때, 좌절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나는 남편을 설득할 수 있고, 정히 벅찰 때는 아주버님이라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으며, 어머님께 직접 부딪혀도 생각보다 평화로운 결과가 있음을 몇 번의 경험으로 깨달았으니까.


시댁의 끝에서, 나는 꼭짓점처럼 옹기종기 조화롭게 모여있는 견고한 가족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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