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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기린 Feb 19. 2019

나의 프랑스인 제부

사랑이 뭐길래

남편이 그린 N의 캐릭커쳐


나에겐 프랑스인 제부가 있다. 금발 머리, 깊은 갈색 눈동자, 새하얀 피부의 조합이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프랑스 남자’처럼 생기진 않았다. 파리의 패셔니스트보다는 실리콘밸리의 스티븐 잡스에 가까운 이미지다. 결혼에 대한 그의 가치관도 내가 알고 있던 자유분방한 파리지앵의 그것과는 좀 달랐다. 내 동생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동거가 아닌 결혼을 결심했고, 그렇게 그는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

그날 거실에 모여 앉은 아빠와 엄마, 나와 남편은 서로 말없이 인터폰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초인종이 울리고 화면에 동생의 얼굴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 뒤에 서 있던 N은 키가 커서 그런지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초조해 보였다. 사진으로 볼 때 썩 잘 생겨 보이지 않았다며 실물은 그보다 못하면 어떡하지, 아님 털이 엄청 많으면 어떡하지 하며 중얼거렸다.


나는 사실 그의 인상착의를 대충 알고 있었다. 처음 파리에 갔을 때 멀리서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큰 키에 호리호리하고 피부가 창백할 정도로 새하얬고 안경을 썼으며, 제스처를 취할 때마다 움직이던 손가락이 참 길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그를 함께 보고 있던 동생이 말했었다.


언니, 나는 저런 스타일의 남자가 좋아. 아까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생각도 참 깊은 것 같더라.”


“야, 쟤가 뭐가 괜찮냐. 너무 범생이 같잖아. 난 차라리 저쪽에 쟤가 내 스타일이다.”


나에게 집을 빌려준 유학생 언니가 데려갔던 모임에서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는데, N 역시 그중에 누군가가 데려온 객원멤버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와 직접 대화할 기회는 없었지만 그의 평판은 들을 수 있었다. 동생의 생각대로 그는 나이에 비해 진중하고 성실한 사람인 듯했다. 하지만 한 달간 파리에 함께 있었던 동생이 나보다 짧게 이곳에 머물면서 누군가를 진지하게 관찰할 여유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한 나는 그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 그때의 인연은 이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그 후로도 몇 차례 그 모임을 나갔지만 N을 다시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 N이 우리 집 현관에 서 있는 것일까? 생전 처음 와 보는 나라에서 관광지가 아닌 어느 가정집 인터폰을 통해 긴장으로 마른침을 삼키는 목젖을 인터폰 그대로 내보이면서.


국경 없는 인연

나와 한 달간 파리 생활을 하고 한국에 돌아간 후, 동생은 바로 파리로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파리에 대한 상사병으로 시름 거리는 나를 보면, 그때 재빠르게 파리를 쟁취하기로 결심한 동생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어쨌거나 우리 자매는 둘 다 첫 만남에 파리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놈의 파리가 대체 뭐길래.


지금 와서 내 친구들 중 몇몇은 동생이 혹시 N을 다시 만나려고 파리에 간 것이 아니냐고 묻는데, 그건 분명 아니었다. 동생이 나보다 행동력이 강하고 자기주도적인 사람인 건 맞지만 자기의 존재조차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서 삶의 터전을 바꿀 만큼 무모한 사람은 절대 아니다.


동생이 N을 다시 만난 건 친구의 결혼식에서였다. 그때 그 모임에는 또래들 뿐 아니라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분들은 동생의 파리 정착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참 감사한 인연들이다. 결혼식의 주인공들 역시 그 안에서 맺어졌다. 신부는 파리에서 동생의 부모님 노릇을 자처하신 분들의 딸이었고, 신랑은 내가 그때 동생에게 내 스타일이라고 지목했던 그 훈남이었다.


동생은 그 결혼식 준비를 두 팔 걷고 도왔다. 웨딩플래너라는 개념이 없는 프랑스에서는 결혼식 준비를 신랑 신부의 친구들이 도맡는다. 피로연 프로그램부터 식장을 꾸미는 일, 답례품 준비와 때로는 음식 준비까지 직접 하는 경우가 많다. 동생은 피로연에서 음식을 서빙하고 손님들을 챙기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정신없이 일하다가 잠시 숨을 돌리는데, 피로연장에 ‘강남 스타일’이 울려 퍼졌다. 동생은 정리하던 빈 접시를 내려놓고 신명 나게 ‘말춤’을 췄다. 타고난 끼가 있는 아이라 춤을 추는 순간 아마 피로연장에 있던 누구보다 튀었을 것이다. 게다가 한국인이 추는 ‘오리지널 말춤’ 아닌가.


“저 조그만 여자애는 누구지? 엄청 재밌네”


그것이 N의 눈에 내 동생이 처음 각인된 순간이었다. N은 친구에게 동생의 연락처를 물어 얼마 뒤 데이트 신청을 해왔다.


한국에서의 첫날밤, 굿나잇!

현관문을 열자 N이 쑥스럽게 “안-녕하thㅔ여-?”라고 인사하며 들어섰다. 그런데 전실에서 머뭇거리더니 다시 밖으로 나가 현관문 밖에 신발을 벗어두고 들어온다. 그런 N의 신발을 챙겨 들어오며 동생이 멋쩍게 웃는다.


“한국에서는 집 안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는다고 배워서 그래.”


한국 여자와 먼저 결혼한 훈남 친구가 교육을 단단히 시켜놓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집 안인지의 경계가 프랑스와는 달랐던 것이다. 동생은 그 와중에 N에게 ‘전실’과 ‘현관’, ‘신발장’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둘이서 이미 우왕좌왕하고 있으니 우리 엄마가 도도하게 굴 여유가 없었다. 그런 게 뭐 중요하냐며 N의 팔을 잡아끌고 집 안으로 들였다. 엄마 성격에 거실 소파에 꼿꼿하게 앉아 “왔는가?”라고 무심한 듯 시크하게 스캔 모드를 가동해야 하는데 연고 하나 없는 타국에 여자 하나 믿고 와서 어버버 거리고 있는 이 가여운 외국인에 대한 연민이 먼저 발동된 것이다.


말도 안 통하는 막내딸의 남자친구 앞에서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두서없이 하고 싶은 말을 계속 쏟아내는 아빠,

어색하기도 하고 탐색하느라 바빠서 거의 말이 없는 엄마 앞에서 N은 분위기를 바꿔보려 가방에서 이것저것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중 ‘포숑’의 마카롱을 보고 나는 남편에게 한 마디 했다.


“아니, 파리에 얼마나 마카롱 맛집이 많은데 롯데백화점에도 있는 포숑을 사 오냐.”


하지만 처형 유세를 교묘하게 떨기엔 내 영어가 부족했다. 좀 더 폼나게 트집 잡을 게 없나 살피던 내 눈에 동생의 표정이 들어왔다. 자기가 만났던 남자는 다 시시했다며 결혼은 생각 없다던 동생이 두 눈 가득 하트를 품고 N을 챙기고 있었다. 엄마는 내가 연애할 때 연상인 남편을 오히려 배려하고 챙기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런데 동생의 모습을 보니 그때의 내가 떠올랐다. 혹시라도 부모님한테 밉보일까 봐 실수라도 하기 전에 내 말과 손이 먼저 나섰던 순간들. 갑자기 외국인과 결혼을 전제로 만나보겠다고 데리고 온 동생의 심정은 오죽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배짱 있는 성격에도 분명 긴장했을 것이다.


“근데, 쟤 얼굴도 너무 작고 코는 너무 커. 적응이 안되지 않니?”


엄마는 이대로 한 번에 좋아해 주기는 뭔가 억울했는지 나에게 귓속말로 한 마디 찔렀다. 대화를 거의 안 해본 상태에서 흠잡을 것이 외모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처음으로 찬찬히 뜯어본 N은 단순히 외모만으로 단정 지을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고 다부지게 다문 입꼬리에는 여유 있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왜, 인상 좋기만 한데. 한국에 와서 부모님께 인사부터 드리자고 먼저 말한 것도 쟤래. 애가 괜찮은 거 같아.”


내가 빗장을 해제한 태도를 취하자 그제야 엄마도 ‘딸만 둘 가진 새침한 엄마’ 모드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흡사 게스트하우스 호스트처럼 프로페셔널하게 N을 대해주었다. 아직 한국인의 ‘정’까진 줄 수 없어도 ‘예의’는 확실하게 보여주겠다는 굳은 의지가 보였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엄마가 N에게 ‘N, 잘 자!’라고 인사하자 N도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잘 자!”


동생이 또 푸르르 떨며 N을 잡아끌었다. 그날 동생과 함께 자며 참 인연이 신기하다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N에게 단도리질 너무 심하게 하지 말라며, 나는 너희 인연만 생각해도 N이 참 소중한 사람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동생도 그날 밤, 참 잘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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