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무서운 진짜 이유
누군가 내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뭐냐고 묻는다면 ‘죽음’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다음으로 무서운 게 뭐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엄마’다.
엄마한테 이른다?!
우리 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어마 무시하게 단호했다. 숫돌에 박박 갈아낸 칼날로 무를 자르듯 한 번 안된다고 한 건 절대 안 되고 한 번 해준다고 한 건 꼭 해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해준다는 말을 잘 안 하는 것 같다) 그런 엄마가 화가 나면 두 가지 방식으로 표출되는데, 하나는 끝을 잘라낸 듯 멈추지 않는 잔소리, 하나는 시작을 잘라낸 듯 기약 없는 묵언수행이다. 보통 전자는 나에게 후자는 아빠에게 시전 된다. 자기처럼 인생의 절반을 이미 살아버린 아빠보다는 내가 좀 더 개도의 여지가 있다는 판단에서 일까. 아무튼 나는 엄마의 그 끝이 없는 잔소리가 두려워 아예 잔소리 들을 일은 하지 않거나 숨기는 편이다.
파리에서 동생과 함께 지낼 때, 내가 노느라 12시를 넘기면 여지없이 동생에게서 문자가 왔다.
“언니, 내가 밤에는 위험하다고 빨리 들어오라고 했지? 자꾸 이러면 엄마한테 이른다!”
그 말을 들으면 엉덩이가 번쩍 떨어졌다. 그렇게 엄마의 랜선 잔소리조차 나에겐 공포 그 자체였다.
장모님한테 이른다?!
신혼 초에 우린 자주, 치열하게 싸웠다. 한 번 불이 붙으면 그 이유는 까맣게 잊고 말꼬리에 말꼬리를 물고 각자의 주장을 정교화해가며 상대방의 마음을 더 예리하게 베어냈다. 연애하면서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기에 나도 우리가 이렇게 싸울 수 있을지 몰랐다. 게다가 말하는 걸로는 누구에게 져본 적 없는 내가 남편과 설전이 붙으면 이상하게 휘말렸다. 논리적으로 문제점을 지적하고 내가 이해를 못하면(혹은 하기 싫어하면) 점점 언성이 높아졌다. 나는 그런 남편을 이겨보겠다고 극단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한 번은 차라리 내가 눈 앞에서 사라져 주겠다며 현관에 나가 신발을 신는데 남편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나가면 다시는 못 들어올 줄 알아.”
남편 성격도 우리 엄마 못지않게 단호한 걸 알기에 나는 민망함을 무릅쓰고 슬며시 신발을 벗었다.
이건 지금 생각해도 내가 돌았구나 싶은데, 주방에 가서 칼을 가져온 적도 있다. 내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을 정녕 눈곱만큼도 이해를 못하겠다면 혈서로라도 증명하겠다며 손목에 칼을 가져다 대며 협박했다. 이미 나도 이성을 잃은 상태였지만 그때 남편의 눈빛에 당혹감과 분노가 동시에 스치는 걸 봤다.
“너 아주 안 되겠구나. 장모님한테 말씀드려야겠다.”
그 말 한마디에 나는 제정신이 돌아왔다. 그리고는 아직 멀쩡한 내 손목으로 통화 목록을 여는 남편의 손목을 있는 힘을 다해 부여잡았다.
“오빠, 안돼. 우리 엄마 알잖아. 지금 전화하면 우리 정말 이혼이야. 이혼하고 싶으면 전화해.”
남편 역시 그 말을 듣더니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 일로 나는 몇 날 며칠을 남편에게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원래 예상했던 패배보다 더 참혹한 패배였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
세월이 지나면서 부부싸움은 칼로 손목.. 아니 물 베기라는 말이 어느 정도 이해되었다. 이 말은 사실, 싸움을 한 게 전혀 없던 일처럼 된다는 뜻은 아니다. 애써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조금씩 서로에게 양보하고 포기하는 방법을 배워 나가면서 물에 칼이 녹슬듯 점점 무뎌지는 것이다.
싸움은 항상 남편이 이겼지만, 양보와 포기를 더 많이 한 것도 남편이었다. 그게 우리 사이에 권력의 균형을 만들어주었다. 우리는 이제 그때만큼 미친 듯이 싸우진 않는다. 가끔 싸움이 시작되면, 반사적으로 그동안 깨우친 방어 기술이 발동된다. 나는 남편이 한 숨 고를 수 있도록 기다리고, 남편은 자기가 잘못한 부분을 빨리 인정하고 내 감정을 이해한다는 표시를 한다.
한 때 북한과의 전쟁에 대한 우려가 커져가던 시기에 만약 전쟁이 나서 통신이 두절되면 만날 장소를 정해두자고 얘기한 적이 있다. 그 얘기 끝에 내가 했던 말이 있다.
“오빠, 아무리 싸웠어도 잠들기 전에는 풀자.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고 또 하루를 살 수 있다는 게 당연한 일은 아니잖아. 밤 새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어. 그리고 출근하기 전에도 꼭 웃으면서 인사하자. 저녁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도 보장할 수 없는 거니까. 나는 우리에게 예기치 못한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서로에 대해 떠올릴 마지막 모습이 화난 모습이길 바라지 않아.”
그래서 우리는 부부싸움에 대해 하나의 룰을 정했다. 우리 성격에 아예 안 싸울 수는 없을 것 같으니 싸우게 되면 최대한 빨리 풀고, 상대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극단적인 말이나 행동은 자제하기로.
가장 두려운 결과는 엄마가 상처 받는 것
요즘 대한항공 조현아 부사장의 이혼 소송이 이슈가 되고 있다. 그녀의 남편이 검찰에 제출한 동영상과 녹취파일이 방송에 나오고, 패널들은 ‘일반적인 부부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 같은 모습, 그리고 싸움의 주제 등은 다르지만 분노 게이지로만 따지면 우리 부부도 못지않게 싸워본 것 같다.
우리가 싸우는 모습을 누군가가 봤다면 똑같이 얘기하겠지. ‘저 부부는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라고. 모든 부부가 다 우리처럼 맹렬하게 싸우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부부가 다 저마다의 싸움의 기술을 연마하며 살아간다. 한 번도 부부싸움을 한 적 없는 부부도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이미 겉으로 싸움이 터지기 전에 상대방에 대한 분석과 전략을 끝낸 고수들이다. 그 과정에서 자기 마음속에서 수도 없이 상대방과 부딪히고 싸웠을 것이다.
남편의 ‘장모님에게 말한다’는 한 마디가 그렇게 두려웠던 이유는 엄마는 남편의 아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부 싸움을 포함한 부부간의 일은 아무리 엄마여도 절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남편의 장점도 알고, 남편이 나에게 주는 행복의 크기도 알고 있다. 아직까지는 그 크기가 남편에게 서운하고 화가 나는 정도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랑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싸웠다는 것을 엄마가 알게 되면 엄마에게는 ‘싸웠다’라는 사실과 ‘속상하다’라는 감정만 남게 된다. 부부 사이의 히스토리에 기반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을 설명할 길은 없기 때문에 엄마는 나를 한심해하고, 김서방을 미워한 채로 마음이 굳을 것이다. ‘그러게 내가 뭐랬니’라는 냉소와 함께.
칼로 도려낼 수 없는 물처럼, 부부 사이는 계속 흘러간다. 부모님에게 싸움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은, 여울목이나 큰 바위를 지나며 침전된 흙이 튀어 오른 물을 고대로 길어 부모님의 물병에 담아 드리는 일이다. 그 물은 부모님의 마음속에서 점점 탁해지고 썩어갈 것이다. 아무리 부부 사이가 다시 잔잔해지고 맑아졌다 하더라도 믿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가 한 때 장렬하게 싸우고 지금의 평화를 이룩했다는 것을 양가에선 모른다. 엄마는 김서방이 너무 물러 터졌다고 하고, 시어머니는 둘이 알콩달콩하게 사는 게 보기 좋다고 하신다.
그때 끝내 통화 버튼을 누르지 않은 남편, 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