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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기린 Mar 27. 2019

아빠, 난 아빠 같은 남자 안 만날 거야

그리고 엄마 같은 남자랑 결혼했다


무수한 딸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어릴 적 꿈은 '아빠 같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었다. 아빠는 주말마다 자동차에 가족들을 싣고 바다로 산으로 출동하고 집에서는 때때로 말로 변신해 나와 동생을 번갈아가며 질릴 때까지 태워주었다. 걸핏하면 심기를 건드리는 가시 돋친 말로 핀잔을 주는 엄마에게도 늘 이쁘다, 귀엽다 일방적인 애정표현을 하는 다정한 아빠를 사랑했다.


하지만 철이 들고 엄마의 핀잔들이 해갈되지 않는 정서적 욕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하자 생각이 좀 달라졌다. 아무리 아파도 결근 한 번 없이 성실하게 한 직장에서 30년을 무사히 버텨낸 아빠는 무엇이든 새로운 도전보다 안정적이고 편안한 것을 선호했다. 그리고 그 보장된 현재에 충성을 다 했다. 결혼 생활에서도 그랬다. 애초에 구조적으로 혼인 서약을 한 이상 가정에 소홀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조금 서글픈 것은, 아빠가 부양의 의무와 가족을 사랑하는 책임에 충실한 것이 엄마에게는 그저 결혼생활의 필요조건일 뿐이었다는 데 있다.


너희 아빠는 밥만 해주면
누구랑이라도 살 사람이야

나는 엄마의 이 말을 믿지 않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는 한다.


엄마는 상대방의 행동을 통해 그의 마음을 확인하려는 사람이다. 그런 생각은 자연히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 사랑'이라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자기에게 관심이 있다면 당연히 자기가 무엇을 통해 만족감을 얻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엄마에게는 아빠가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것이 불면증이 있는 자신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밤늦은 시간 귀갓길이 걱정되어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그렇게 잘 시간을 놓치면 아빠가 들어온 후에도 엄마는 꼬박 날을 새우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함께 외출할 때면 뭐하러 밖에서 돈 쓰냐고 커피는 집에 가서 마시자며 분위기를 깨는 아빠를 끌고 결국 커피숍을 갔다가 멀뚱멀뚱 주변 사람들 구경만 하고 자기에게 그럴듯한 대화 소재 하나 던지지 못하는 남편에게 실망해서 돌아왔다. 나들이를 가면, 아무리 먼 거리라도 군소리 하나 없이 왕복 운전을 해주는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보다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자리를 깔고 잠부터 청하는 남편 때문에 천방지축 두 딸이 지칠 때까지 한 몸 부서져라 함께 놀아주는 것은 늘 자신이라는 데 대한 화가 먼저 치밀었다.


어느 순간 아빠는 엄마가 모든 것을 다 준비하고 계획하면 시키는 것만 하는 수동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적인 토론이나 감상적인 대화는 불가능한 무미건조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엄마는 남편에게 스스로의 가치를 단지 '밥 해주는 사람'으로 전락시켰다.


그리고 나 또한 아빠가 뚜렷하게 잘못한 것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느새 ‘정서적 유대감'이 결혼생활의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꼭 시시콜콜한 것부터 진지한 것까지 말이 잘 통하는 남자를 만나야지. 그랬다.


"아빠, 나는 아빠 같은 남자 안 만날 거야. 재미없어."

"어이구, 언제는 아빠 같은 남자 만날 거라고 하더니?"


언제나처럼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어넘기던 아빠의 얼굴이 기억난다. 하지만 그 말을 하며 속으로는 얼마나 헛헛함을 삼켰을까. 굳이 그런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아빠에게 말한 그때의 내가 참 밉다.


아빠는 나 시집가서 서운하지 않아?

나에게도 엄마처럼 아빠 마음을 말로 확인하고 싶었던 순간들이 있었다. 결혼하던 날, 신부 입장을 앞두고 버진로드 끝에 나란히 서서 대기할 때, 아빠에게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빠, 떨려?"

"아니? 뭐가 떨리냐. 그냥 걸어가면 되는데."


그렇게 너스레를 떨던 아빠가 막상 행진이 시작되자 몸이 빳빳하게 굳어 그 긴 다리를 아주 조금씩 움직이는 바람에 준비한 음악이 끝나도록 신랑에게 도착하지 못해 처음부터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하객들은 아버지가 딸을 시집보내기 아까워서 일부러 천천히 걸은 것 아니냐고 웃음꽃을 피웠다. 그럴 리가. 우리 아빠는 그런 사람 아닌데. 첫째 딸이 집안의 개혼을 준비하면서 엄마와 쌍으로 부산을 떨어댈 때도 뭘 그렇게 열심인지 궁금해하지도 않던 아빤데.


"아빠, 아빤 나 시집간다는 데 안 섭섭해?"

"섭섭하긴 무슨. 너 시집가면 우리 집 전기세, 물세, 식비 절반으로 줄 거 같은데? 냉장고에 자물쇠 채워 놓을 거니까 친정 와서 살림 털어갈 생각일랑 말아라."


아니 그걸 농담이라고 저렇게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얘기할 것까진 뭐람. 하여튼 멋대가리도 없어. 나는 서운한 마음을 보상받고 싶어서였는지 예비신랑이었던 남편에게 이렇게 물어보았었다.


"오빠, 오빤 혼자 벌어서 혼자 쓰고 살면 만사 편하고 풍족할 텐데 왜 결혼해?"

"물론 그렇겠지만 나는 혼자서 풍족하게 사는 것보다 너랑 둘이 부족한 듯 살아도 그게 훨씬 행복할 거라고 확신하니까."


그래, 나 남편 잘 골랐어. 우리 아빠 같았으면 "어이쿠, 그러게. 실수했네. 으하하."라고 대답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 곧 '아빠 잘 가'하겠네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아빠가 했던 말이 새삼 떠올랐다. 그날은 결혼식 날짜를 몇주 남겨두지 않고 남편이 우리 집에 저녁 식사를 하러 온 날이었다. 평소 체력이 약한 엄마는 식사 준비를 하고 나서 장렬히 전사했다. 먼저 잠자리에 든 엄마를 두고 아빠와 동생과 함께 남편을 배웅하러 전철역까지 함께 나갔다. 개찰구 앞에서 "오빠, 잘 가!" 하고 돌아서는데 아빠가 중얼거리듯 "이제 곧 오빠 말고 아빠 잘 가! 하겠네."라고 말했다. "아, 그러게?"라고 대답하며 아빠와 동생 팔짱을 한쪽씩 끼고 집에 온 나는 안방으로 들어가는 아빠의 등이 사라지기도 전에 내 방에 들어와 남자 친구와 통화하느라 바빴다.


돌이켜보니 나도 '내가 생각하는 아빠'랑 크게 다를 게 없다. 그때 아빠의 그 말에 어떤 감정이 담겨 있었는지 당시에는 전혀 헤아려보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그날 그 말 한마디가 아빠로서는 가장 살갑게 아쉬움을 표현하는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성실함과 책임감은 가히 군인 수준인 우리 아빠에게 가족 구성원의 이탈이 주는 상실감이 어떤 것이었을지 이제 겨우 짐작을 한다.


아빠는 아직도 나한테 보고 싶다는 말도, 집에 한 번 들르라는 말도 일절 한 적이 없다. 안부 전화마저도 조금 자주 한다 싶으면 대번 본인들은 신경 쓰지 말고 니 생활이나 잘하라고 말하고 내가 용건 없이 전화를 걸면 "왜? 할 말 없으면 끊어라" 하고 시크하게 전화를 끊는다. 엄마랑 아빠가 다투면 엄마는 올림픽대로를 타고 한 달음에 우리 집에 와서 나에게 실컷 아빠 욕을 하기도 하고 카톡으로 하소연을 하기도 하는데 아빠는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나도 자연스럽게 엄마 시각으로만 아빠를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매번 아빠를 달래주는 척 엄마를 대변한다.


"아빠, 고생이 많수. 그래도 아빠가 참아야지 어쩌겠어."

"아빠도 나중을 생각해서라도 엄마 없이 끼니도 챙겨 먹고 밖에서 시간도 보내고 그럴 줄 알아야지."


그런데 아빠가 은퇴한 후로는 이런 조언을 하기도 망설여진다. 아빠도 엄마를 기쁘게 하는 방법을 모를 뿐이라는 걸 알고, 엄마 역시 이제 와 그 방법을 차근차근 알려줄 마음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뻔뻔해 보이더라도 허허 하고 웃어넘기던 아빠의 모습이 그립다.


넌 네 아빠랑 똑같아

아빠 같은 남자와는 만나지 말자는 내면화가 성공했는지 나는 대단치 않은 소재로도 조잘조잘 잘도 대화를 이어가고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줄 아는 세심하고 사려 깊은 남자와 결혼했다.


덕분에 결혼하고 나서 하고 싶은 일을 못한다는 느낌 없이 자유를 만끽하며 지내고 있다. 친정에 혼자 가서 이틀 이상 지나면 엄마가 나서서 걱정을 하기 시작한다.


“김서방 밥은? 이렇게 혼자 오래 둬도 되니?”

“괜찮아. 오빠 혼자 잘 챙겨 먹고 잘 놀아.”

“너 그렇게 네 멋대로 하다가는 나중에 김서방한테 뒤통수 맞는다?”


엄마는 아빠가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집에 늦게 들어오던 그 시간들을 참 외로워했으면서도, 이제는 자기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아빠에게 적응을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남편은 혼자서도 즐겁게 시간을 보낼 줄 알지만 가끔 다투면서 내뱉는 말들 속에 뿌리 깊은 원망이 담겨 있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그 요지인즉슨, ‘넌 결국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하잖아’이다. 그럴 때마다 엄마의 경고가 오버랩된다. 나는 남편에게 어떤 배우자일까?


그러고 보면 우리 남편과 우리 엄마는 닮은 데가 많다. 예민하고 섬세한 것도, 상처를 드러내지 않고 쌓아두다가 아주 작은 자극에 당황스럽도록 크게 터뜨리는 것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만큼 자신만의 영역을 침해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도, 필요 이상으로 인간관계에 에너지를 쏟지 않는 것도. 생각보다 많은 것이 비슷하다. 엄마 말대로, 내가 아빠랑 닮아서 결국 엄마 같은 남자를 만나고  것일까? 아빠의 무신경함 못지않게 엄마의 예민함도 힘들어했던 나인데.


어쩌면 내가 아빠를 보며 나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채로 경계했던 것과 비슷하게 엄마도 우리 남편을 처음 봤을 때부터 같은 의미에서 거리를 두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신기하게도 자기와 비슷한 사람에게는 잘 끌리지 않는 것 같더라.


하지만 나는 엄마와 나를 분리하면서부터 더욱 아빠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되었다. 만약 아빠가 엄마처럼 외부 자극에 민감한 사람이었다면 어쩌면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지금까지 유지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빠가 없었다면 나는 신혼초에 시어머니 말 한마디에 섭섭했을 때, 친정이 주는 위안을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엄마에게 이야기하면 확대 해석하고 본인이 더 서운해했을 테지만, 아빠는 그냥 묵묵히 듣고 있다가 “그래도 너희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들볶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라는 명쾌한 한 마디를 해주기도 하니까. 나는 아빠와의 짧은 대화를 통해 그래도 역시 친정이 ‘비빌 언덕’ 임을 확인해왔다.


아빠 같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자상하신 아버지와 헌신적인 어머니 사이에서..’로 시작하는 헐어빠진 옛날 자기소개서의 상투적 표현을 나는 한 번도 차용한 적이 없었다. 우리 아빠의 성격은 ‘자상하다’로도, ‘무뚝뚝하다’로도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아빠가 엄마 말대로 ‘밥만 해주면 아무나’랑 살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일단 태어났으니 키워야 하는 존재’로 딸을 대하는 사람도 아니라는 것이다.


아빠는 사랑을 믿었던 것 같다. 가슴 깊이. 그리고 당연히 그것이 곁에만 있어도 느껴질 것이라고 생각했겠지. 본인이 자신의 배우자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동시에 본인이 손해를 보거나 속상한 일도 배우자의 탓으로 돌릴 줄도 몰랐으니까.


미련하게 성실한 사랑에 있어서, 나는 아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다만, 엄마의 피드백을 참고해 남편을 외롭고 억울한 상태로 방치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면서.


그렇게 나는 우리 부모님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두 분에게 또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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