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너무 짧다고 느껴질 때
한동안 글 쓰기가 어려웠다. 일 년간의 백수생활을 청산하고 새 일을 시작한 지 이제 막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전혀 다른 업으로 전직을 했기에 모든 것이 새롭고 혼란스럽고, 벅찼고 버거웠다. 하지만 조금씩 일이 익숙해지고 스스로에 대해 다시 생각할 여유가 생기자마자 글을 쓰고 싶어졌다. 어떤 환경에서도 나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심지를 세울 수 있는 힘은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곱씹는 것에서부터 오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그러던 찰나 꼭 기록해두어야겠다 싶은 감정이 생겨 잊기 전에 글로 남기기로 했다.
모든 인연은 특별하지만,
특별한 인연은 따로 있다
매주 월요일은 휴무일이다. 오늘, 남편이 출근하고 혼자서 <동상이몽> 추자현 커플의 결혼식을 보며 주책맞게 눈물을 펑펑 쏟았다. 추자현의 절절한 프로포즈가 마음을 후볐다.
“당신과 함께하는 이 생이 나에게는 너무 짧게만 느껴집니다.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다음 생에도 나와 결혼해줄래요?”
이 말을 듣고 나 역시, 남편과의 시간을 반추해보게 되었다. 첫 만남에서부터 3년 연애시절과 6년의 결혼생활. 9년이라는 그 시간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고 말았다. 앞으로 그 ‘9년’이 몇 번이나 반복될 수 있을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몇 년이나 될까.
재작년, 18년을 기르던 강아지 ‘토이’를 보내면서 부모님과의 남은 시간을 헤아려 보았었다. 내가 앞으로 나보다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소중한 존재라는 점에서 당시에는 부모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살아계실 때 더 잘해 드리고 더 많은 추억을 함께 만들어야지. 그 다짐은 작년의 유럽여행을 결심하게 된 중대한 계기였다. 부모님과의 여행 일정이 모두 끝나고, 두 분이 돌아간 후 숙소에 혼자 돌아왔을 때 뭔지 모를 허탈함에 북받쳐 울었던 기억이 난다.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셋이서 둘러앉아 마지막 와인을 나누던 테이블에는 미처 다 먹지 못한 과일 몇 개가 흩어져있었고 아빠가 외출하고 돌아와 매번 양말을 빨아 널어놓던 옷걸이는 홀가분하게 빈 채로 바람에 흔들거렸다. 부모님의 손길이 닿았던 물건들의 쓸모들이 홀연히 날아가버린 그 광경에 쓸쓸함이 빗방울처럼 후두둑 쏟아져내렸다.
당연한 관계라는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설령 천륜이라 일컫는 부모 자식 간이라 할지라도. 서로의 곁에 머무는 시간이 너무 짧기 때문에 영원할 것처럼 여기고 무던해져서는 안 될 일이다 싶었다.
이런 생각을 이미 했던 나이지만, 추자현의 고백을 듣고 순간 머리가 멍했다. 나는 그 생각을 미처 남편에게는 대입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신혼생활은 놀라우리만큼 자연스러웠다. 마치 원래부터 함께 살던 양, 한침대에서 잠들고 눈 뜨는 것부터 모든 생활공간과 생활패턴을 공유하는 게 하나도 불편하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그러서일까 남편과의 동거는 부모님과의 그것처럼 당연하게 여겨졌다. 어떤 인연의 기적으로 우리가 함께하게 되었는지, 결혼 준비 과정의 우여곡절을 몇 차례나 넘기며 어떤 다짐을 했었는지 굳이 돌이켜볼 필요도 느낄새 없이 말이다. 생각해보면, 평생의 반려자를 선택하는 일은 정말 대단한 결정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스스로 가족을 고르는 그 일은 나뿐만 아니라 상대방도 나에게 특별한 감정과 확신이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에.
내가 선택한 사람,
나를 선택한 사람
갈등이 있을 때마다, 내가 선택한 사람이니 감수하자고 마음먹고 울분을 가라앉혔는데 사실 위기가 지나갈 수 있었던 건 남편 역시 한 번 더 참고, 양보했기 때문임을 간과했다. 뭔가 손해 보는 기분이 들고 희생한다는 억울함이 치밀 때 한 발짝 물러서서 상대방을 찬찬히 살펴봤다면 어땠을까? 기껏 화해하고 나서 앙금을 희석하지 못하고 계기가 있을 때마다 휘휘 저어 질근질근 씹다 다시 뱉어내는 그 깔끔치 못한 뒤풀이를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나의 히스토리 안에서, 그는 내 인생에 들어온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히스토리 안에서의 나 또한 그의 인생에 초대된 사람이다. 나와 남편은 합집합이 아니다. 교집합의 일부만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유일한 주인공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내 인생의 조연이 되어 나를 빛내주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 눈물 나게 고맙다. 아니, 감사하다. 추자현이 몇 번이나 “감사합니다” 라고 되풀이했듯이 감사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매일 아침 내 옆에서 눈 뜨는 그 자연인 그대로의 모습도, 별 것 아닌 일에 어린애처럼 환희하고 때론 투정 부리는 그 모습도 이 세상에서 나만 기억해줄 수 있는 그의 소중한 삶의 조각들인데, 내가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어느 누가 그 가치를 알아줄까.
한 사람의 인생을 품기에, 내 인생 역시 너무 짧다. 그 사람의 한 순간 한 순간이 경이로워서 마치 죽기 전에 전 세계를 다 여행하지 못하듯,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그의 반짝이는 순간들이 더 남아있을까 봐 아마 눈 감는 순간까지도 아쉬울 듯하다. 남편도 같은 마음일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던져본다.
남편아! 나랑 다음 생애에도 결혼해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