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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기린 Mar 08. 2019

간헐적 별거를 주장합니다

별거 76일의 추억

2018년은 나에게 여러 가지로 잊지 못할 한 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의미 있었던 건 6월 1일부터 8월 29일까지 90일을 꽉 채워 다녀온 유럽여행이다. 이 여행의 1차적 목적은 동생의 결혼식이었기 때문에 출국은 남편과 함께 했고, 2주간의 일정이 끝난 후 남편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떨어져 있었던 기간은 76일쯤 되는 셈이다.


보내준 남편이 대단하다


다들 나한테 그렇게 말했다. 일주일도 아니고, 한 달도 아니고 석 달을 유럽에 가 있겠다고 하는 와이프를 선뜻 보내주다니 대단하다고. 남편이 돌아가고 나서 한 달 동안 함께 여행한 엄마 아빠조차도 일정을 줄이고 본인들과 함께 한국에 돌아가자며 김서방이 너무 오래 혼자 있는 것 같다고 걱정했다. (아니, 엄마 나랑 여행 다닐 거 다 다녀놓고 이제부터 나 혼자 좀 즐기겠다는데 왜 그래?) 나는 눈 하나 꿈쩍 않고 엄마 아빠가 돌아간 이후 예정된 날을 꽉 채워 한국에 돌아왔다.


정말 이 기간 동안 에피소드도 많고 느낀 점도 많은데, 그건 나중에 여행기로 풀어볼까 한다. 오늘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결혼 후 온전히 혼자 누리는 자유에 대한 것이다.


사실 처음부터 이렇게 긴 여행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동생의 결혼이 확정되고 나자 일단 회사에 긴 휴가를 양해받아야 했다. 몇 년 동안 줄곧 일주일, 열흘 씩 휴가를 내고 유럽여행을 다녀온 이력이 있지만 이번만큼은 상황이 달랐다. 프로젝트는 숨 쉴 틈 없이 돌아가고 있었고, 내가 맡은 업무는 대체할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내 마음대로 쓰던 연차를 이제 와서 그것도 하필이면 동생 결혼식에 눈치 보며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회사 그만두고 이참에 원 없이 있다가 오는 것은 어때? 유럽에 무비자 체류기간이 90일인가? 그거 꽉 채워서 갔다 와.”


남편의 통 큰 제안에 가장 먼저 놀란 것은 나였다. 늘 막연하게 한 번만 더 파리에서 관광객이 아닌 거주자로 머물러보고 싶다고 소망했지만 정말로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 무렵,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퇴사’라는 말을 욱여넣으며 버티고 있었다. ‘그만두는 거야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니 최대한 해보자. 내가 나를 완벽하게 설득할 수 있는 그 시점이 오면 그때 그만둬도 늦지 않다. 그때가 되면 사람들은 내가 이 일로부터 도망친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상관없을 거야’하면서.


그런 나에게 나 자신을 100% 설득할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인 핑곗거리가 생긴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그래 내가 지금 그만두는 것은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야’라는 자기 최면을 걸었다.


하지만 막상 떠날 준비를 하면서 예산을 세워보니 생각보다 너무 많은 돈이 들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나 그냥 가지 말까 봐. 오빠 혼자 두는 것도 그렇고 이래저래 신경 쓸 게 많네’라고 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난 네가 파리에 가지 않는 옵션은 생각해보지 않았어. 돈이 걱정이면 우리 둘이 여행하는 기간에 최대한 아껴보자. 그리고 너 퇴직금도 있잖아. 그거 다 쓰고 와.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이렇게 길게 가보겠어. 물론 다음에 또 기회가 올 수도 있지. 하지만 30대에 느끼는 것과 40대, 50대에 느끼는 것은 분명 다를 거야. 나는 여보가 나중에 지금을 떠올렸을 때 ‘30대에 가장 행복한 일’중 하나로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그런 일을 만들어두면 1년이라도 더 오래 좋은 기억을 간직하고 살 수 있잖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해.”


내가 생각해도 우리 남편 대단하다. 솔직히 나는 남편에게 똑같이 해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물리적 분리가 주는 온전한 해방

남편은 내가 친정에 가거나 약속이 생기면 의젓(?)하게 자기는 신경 쓰지 말고 천천히 오라고 말해주는 사람이다. 그래도 본업이 ‘와이프’이다 보니 혼자 있는 남편이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밥은 제대로 챙겨 먹고 있는지, 필요한 물건을 못 찾아서 허둥대는 건 아닌지 은연중에 항상 신경이 쓰인다.


그런데 8시간 시차의 지구 반대편에 있다 보니 내가 아무리 걱정이 되어도 챙겨줄 방법이 없었다. 밑반찬 좀 사다놔라, 어머님께 좀 받아와라 시켰지만 그대로 하는지 안 하는지 감시할 도리도 없거니와 말로만 의무를 때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자 점점 포기하게 되었다.


남편은 사실 조금 성가신 데가 있다. 뭐든지 나와 함께 하려고 하고 퇴근 후에는 거의 내 몸에 자기 몸 한 부분은 붙이고 있는 사람이다. 끊임없이 애정표현을 나눠야 하고 회사에서 있었던 모든 에피소드를 공유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꽤나 귀여워서 나도 열심히 받아주는 편이다. 파리 드골 공항에서 헤어질 때 눈물을 글썽이는 남편을 보니 괜히 맘이 뭉클했다. 남들이 보면 한 몇 년쯤 헤어지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랬던 남편이 가끔 ‘보고 싶다’고 카톡을 보내다가도 이내 ‘내가 이러면 여보 맘이 불편하겠지. 나 혼자 잘 있을게!’라고 다짐하는 걸 보면서 이 사람이 나를 여기에 보내기까지 참 큰 마음먹었겠구나 싶었다. 한 시도 허투루 보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자 점점 지금의 나에게 또렷이 집중이 되었다. 멋진 것을 보거나 근사한 요리를 먹을 때마다 남편이 떠오르는 것은 변함없었지만 문득문득 남편 걱정에 주춤하던 순간들이 없어졌다. 여행의 마지막 과정이었던 ‘파리에서의 한 달 살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매일 저녁 숙소에 혼자 있던 시간이다. 숙소로 향하는 발걸음은 늘 무겁다. 아무도 없는 빈집에 들어가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낮시간 동안 온통 반짝이는 파리의 거리를 누비다가 작은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서면 공허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런 기분도 잠시, 기운을 차리고 씻고 나오면 그때부터는 완전히 다른 감성이 찾아온다. 한국에서는 잘 볼 수 없는 희귀템 맥주 한 캔을 뜯고 한인마트에서 구한 매운 컵떡볶이를 먹으며 창 밖의 에펠탑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루는 정각에 맞춰 조명이 샤랄라하게 부서지는 에펠탑을 넋 놓고 보다가 잠깐 시선을 돌린 곳에서 우연히 건너편 집 커플을 보았다. 무슨 기쁜 일이 있는지 대화 중에 갑자기 와락 포옹하고 입을 맞추는 그들의 모습이 그날만큼은 에펠탑보다 더 빛이 났다. 그리고 나에게도 저렇게 부둥켜안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사했다. 새벽 1시, 에펠탑의 마지막 스파클링에는 노란색 조명은 꺼지고 하얗게 점멸하는 조명만이 남는다. 바로 그 ‘화이트 에펠’을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돌아가는 택시비를 감수하고 에펠탑 근처에 모여든다. 잠시 떨어져 있던 그때의 우리도 마치 화이트 에펠과 같았다. 잠시 불은 꺼졌으나 굳건히 그 자리에 있고, 우리가 쌓아온 시간들은 그 언제보다 행복하게 각자의 공간에 잔존하고 있었다.


한 걸음 떨어졌을 때 보이는 것들

파리에 머무는 동안 동생네 커플이 바쁜 와중에도 종종 나를 찾아왔다. 함께 근교로 나들이를 다녀오기도 했고 내 숙소나 동생네 집에서 식사를 하기도 했다. 하루는 동생네를 만나기 바로 전날 남편과 카톡으로 격렬하게 다투었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갈 날짜가 다가오면서 남편에게 때늦은 현타가 온 것이다. 이제 외벌이에, 내 퇴직금은 여행에 고스란히 들어간 상황에서 앞으로 어떤 계획을 세워야 할지 혼자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까지는 매우 정상인데 문제는 꼭 그럴 때 다른 소재로 딴지를 걸고 선생 노릇을 하려고 한다는 데 있다.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는 좀 생각해봤어?”

“잘 모르겠어. 오빠가 일단 생각하지 말고 즐기라며?”

“너 퇴사하고 벌써 네 달이나 지났어. 아직도 아무 생각이 없다니 거긴 대체 왜 가 있는 거야?”

“오빠 말만 믿고 여기 온 내가 잘못이다.”


안 그래도 마음 한켠 미안함이 있는데 저리 말하니 괜히 찔려서 되려 성을 냈다. 나중에 남편이 해명하길 내가 한국에 돌아와서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데 해놓은 게 없네’라고 푸념하며 자책할 것 같아서 자기가 조바심이 나서 그랬다고 한다. 이 부분은 내가 전적이 많아서 반박도 못하겠다. ‘~했었어야 했는데’가 입버릇이니, 원.

그래도 그때는 못내 서러워서 동생네 커플을 붙들고 하소연을 했더랬다. 혼자 멋있는 척 다하면서 보내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본전 생각나나 보다고 쪼잔한 놈, 못 믿을 놈 해가며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내 말을 가만히 듣더니 제부가 말했다.


“네가(‘You’를 번역하자면) 여기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더 가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런 걸 거야. 그리고 단지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고 너에게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주기 위해서는 돈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에 그랬겠지.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는 것도, 한 번에 큰돈을 쓰는 것도 처음이니까 그도 혼란스러울 수 있고. 무엇보다 나는 네 동생을 절대 혼자 어디에도 보낼 수 없을 것 같아. 그는 정말 너그러워.”


이후로도 동생네 커플의 결혼생활에 대한 생각을 들으면서 나도 내 역할과 남편의 진심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가장 가까운 사이인 자매이기에 창피하다는 생각 없이 형부의 만행(?)을 낱낱이 일러바쳤는데 돌아온 것은 맞장구가 아니라 깨달음이었다.


남편에게도 필요했던 시간

남편 역시 내가 없는 동안 많이 외롭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겁기도 했다고 한다. 그 이유를 들어보니 나와 비슷했다. 집에 내가 있을땐 모든 것이 내 위주로 돌아갔었는데, 애착 대상이 없어지자 어쩔 수 없이 본인에게 집중하게 되더란다. 혼자 간단하게 저녁을 때우니 시간이 많아져서 좋아하는 일들에 더 진득이 몰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가령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는 일 같은 것 말이다.


남편과 나는 이번 일을 계기로 함께 있는 것이 무엇보다 좋지만 따로 있을 때도 그 나름의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나 자신이며, 어디까지나 서로의 자발적 동의로 함께 살고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은 사랑의 밀도를 더욱 높여주었다. 상대가 그저 습관처럼, 혹은 외로움 때문에 나와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스갯소리로 몇 년에 한 번은 이렇게 떨어져 지내는 것도 괜찮겠다고 말한다. 일상 속에서도 더욱 독립적이 되었다. 시가나 처가에 갈 때는 둘 다 함께 원할 때만 같이 간다. 그 외에는 각자 따로 자기 집에 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기본적으로 상대방 때문에 무언가를 못하거나, 억지로 하는 일은 없도록 각자의 영역을 지켜주는 편이다. 그래서 무언가를 함께할 때면 서로 이견이 전혀 없다. 모든 결정이 이미 상대방의 온전한 동의를 함의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더할나위없이 아름다웠던 76일간의 별거.

그래서, 우리 언제 또 헤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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