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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릐 Aug 23. 2022

100일간의 코로나 일기 17일 차, 20200403

감정의 깊이의 평면적 관찰

집에 있는 시간을 활용하여 최근 다채로운 요리를 시도하였다.

정체불명의 파스타에서 시작해서, 또 다른 국적 불명 파스타,

닭곰탕을 진하게 우려서 그 육수로 다양한 국물 요리를 시도해봤고

최근에는 미역국을 또 진하게 우려내서 풍족하게 먹었다. 미역이 워낙 돌 같아서 하루 밤 깊게 고아 내니 그제야 미역이 부들부들해졌다.

유부초밥도 생애 처음 만들어보고 그리고 밀가루로 시작하여 칼국수 면을 직접 뽑아보았다.


다양한 한국 요리, 혹은 이런저런 요리를 해 먹었지만 단 한번 유리에게 먹어보라고 한 적이 없다.

유리도 어연히 요리를 할뿐더러 방에서 나오지 않은 때에 굳이 불러내서 먹으라고 하기도 어색했고,

또한 쪼잔한 마음에 내 음식을 나눠주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이 속 좁은 나 새끼…

유리가 종종 배달 음식을 시켜먹거나 주변에서 음식을 포장해오는 모습을 가끔 봐왔는데, 오늘따라 왠지 그 모습이 짠해 보였다.

그래서 오늘은 유리와 나눠먹기 위해 오랜만에 바나나빵을 만들었다.


내가 바나나빵을 내니 유리의 방 안에서 와인이 나왔다. 받아야 주는 스타일이구나 너도.

금요일 저녁 두 남자가 함께 하는 바나나빵에 와인이 곁들여진 토크가 시작됐다. 같이 지낸지는 며칠 되었지만 제대로 이야기를 진득하게 해 본 적은 없었다.

따뜻한 바나나빵의 온기만큼 무르익는 우리의 대화 속에 지난 시절 각자 삶의 역경과 시련과 고난과 슬픔과 좌절의 진액이 검붉은 와인 빛처럼 짙고 묽게 서로의 마음에 흘러내렸다.

약 30년 인생에 아직은 감내할 수 있을 정도의 어려움이 발화제가 되어서 지금 이 시간과 장소까지 우리를 이끌었고 예상치 못한 인연과 공감을 이끌어낸다.

페루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피부에 남은 상처를 보면 그 사람의 겪은 일을 알 수 있다.


말을 통해, 눈빛과 표정을 통해 전달되는 감정의 깊이의 평면적 관찰이 무심하다.

한 사람이 겪은 어려움의 농도와, 깊이와, 무게를 그 누가 알 수 있으랴

수 없이 밟히고 지나가는 새까만 맨홀 뚜껑 그 아래의

알 수 없는 어두움의 깊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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