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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릐 Jan 17. 2023

100일간의 코로나 일기 22일 차, 20200408

그리고 곧 들어가게 될 새로운 집. 해 지는 저편으로.

오후 5시가 넘어가는 시간. 보고 있던 원피스 토토랜드 애니메이션을 닫고 3일 만의 외출을 준비한다. 서머타임이 시작된 이래로 해는 7시가 지나야 지기 때문에 5시는 아직도 한낮의 느낌을 풍긴다. 다만 햇살의 색상이 시간의 흐름을 알려준다. 

아직 찬 바람의 기운이 남아있던 지난 주말에 비해 3일이 지난 오늘은 어떤 기온일지 잘 가늠이 되질 않는다. 예년의 기억을 더듬어 매년 이맘때에 입는 같은 옷을 꺼낸다. 검은 가죽 재킷과 흰 티셔츠, 그리고 청바지와 흰 운동화.

2주일이 넘게 사용해 온 방역용 마스크를 쓰고 장바구니를 챙기고 현관문을 연다. 3일이란 시간이 이토록 길었나 싶을 정도로 느껴지는 오랜만의 외출이다. 

햇살과 공기와 에너지는 예년과 다르지 않은 봄의 기운을 가득 품고 있기에 인터넷을 통해 코로나의 소식을 듣지 않는다면 그냥 평범한 날처럼 느껴진다. 


오늘 새로 자른 머리가 비추는 닫힌 가게들의 유리창들을 힐끔힐끔 바라본다. 평범하게 정리한다고 한 머리인데 아무래도 혼자 자르다 보니 미흡한 점이 많이 보인다. 

의도치 않게 바가지 머리가 되어 버렸는데 그 머리조차 베를린이라는 공간이 어우르는 분위기 덕에 실패가 아닌 개성으로 보이게 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신기하다. 얇아진 옷차림도, 움직이는 근육들이며 그 표정들, 익숙하면서도 낯선 사람들이 내가 있는 장소가 독일임을 내 눈에 새긴다. 

마치 몇 달 만에 사람들을 보는 양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굳이 멀리 있는 슈퍼마켓에 장을 보러 간다. 

닫은 가게들 앞에 옹기종기 모여서 기울어가는 태양 빛에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이 처량하기까지 하다. 

맥주 한 모금에 아쉬움 삼키고, 다음 한 모금에 그리움 삼키고, 석양을 안주삼아 친구 삼아.


코로나가 준 일상의 변화를 유지한 채로 얼마나 살아가게 될지. DM이라는 드러그스토어에 들어가니 바닥에 1.5미터의 거리를 유지하라는 스티커가 군데군데 붙어있다.

계산대에는 점원 주변에 플라스틱 벽이 설치되었다. 어느 사람이 자기가 찾고 있는 물건을 보고 있으면 그 사람이 볼 일이 끝날 때까지 약 1.5미터 밖에서 기다린다.

조금씩 생활 속에 녹아져 가는 사회적 거리 두기처럼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조금씩 익숙해져 가는 작은 변화들이 어느새 몸에 배어져 간다.

새로운 립밤을 산다. 이번 립밤 또한 새로운 도전이다. 최적화된 립밤을 찾기 위한 노력은 끝나지 않는다. 

슈퍼마켓에 들어간다. 이사하기 전 마지막 일주일치 식량을 구축한다. 사재기의 흔적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계란 두 줄, 돼지 목살, 야채는 귀찮다. 대신에 과일 주스를 고른다. 

살 것도 더 없는데 괜스레 더 돌아다닌다. 사람들을 보는 일이 아직도 신기하다. 유기농을 챙겨사는 젊은 남자의 집이 괜히 머릿속에 그려지고,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재료를 고르는 아줌마의 집도 머릿속에 그려진다. 움직이는 근육들이 신기하다. 항상 화면으로만 보던 그 모습들.


황금빛 석양이 돌아오는 길의 내 시선을 지배한다. 서쪽으로 돌아가는 그 길 따라 따라가다 보면 나오는 우리 집.

그리고 곧 들어가게 될 새로운 집. 해 지는 저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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