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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릐 Jan 23. 2024

수염이 좀 자라서 지저분한데 내가…

100일간의 코로나 일기 38일 차, 20200424

약 2주 정도 면도를 하지 않았다. 왜구 느낌으로 수염이 자라서 내가 보기에도 재수 없는데 어차피 만날 사람도 없기에 무작정 면도를 안 하고 지냈다. 

특히나 최근 빠진 만화영화 원피스에서 상디가 턱수염이 살짝 있는 캐릭터로 그려지는데 중학생 감성으로 만화영화 캐릭터 핑계 대면서 길러왔다. 

지금 수염 정도 되니 내가 스스로 적응을 했는지 나름 볼만하다는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사람을 안 만나다 보니 정신병이 깊어진다.


오늘은 드디어 고단한 노력 끝에 얻은 첫 집 방문 일정이 있는 날이다. 어제부터 조금 설레었다. 어차피 안 될 테지만.

사진으로는 상당히 좋아 보이는데 실제로도 그럴지, 방 크기는 어떠한지. 채광과 분위기는 어떨지. 동네 분위기는 어떻고 교통편은 어떠할지. 1층이라고 하는데 너무 바깥 교통에 시끄럽거나 하지 않을지 등.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집 방문에 대한 상상을 어제부터 하고 지냈다. 태연한 척 보내려고 한 하루지만 이렇게 사소한 한 가지 일로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는 내가 속좁고 짜증 났고 

그런 감정을 시원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아닌 척 태연한 척하는 모습도 얄밉다. 


저녁 7시 약속이다. 오후 5시부터 조금씩 천천히 나갈 채비를 한다. 오랜만의 외출 준비다.

방문 후 바로 부동산 회사에 보낼 수 있게 이메일과 서류도 준비해 놓고, 어떤 옷을 입을지도 나름 생각해 두었다. 

설레는 마음에 여자친구와 통화를 했다. 나갈 채비를 마치고 나가려는 찰나 여자친구가 말한다. 

“인상이 중요하니까 전문직 깔끔한 인상을 보이는 게 중요할 것 같아.” 100% 동의했다. 

“수염이 좀 자라서 지저분한데 내가…” “면도하고 나가자.” 그간 면도하라는 소리를 몇 번 들었지만 귓등으로도 안 들었는데, 집 방문 시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면도를 하라는 여자친구의 말에 단번에 넘어가 정성스레 면도를 시작했다. 

면도를 마치고 모자를 쓰고 나가려고 하자, 모자 쓰면 너무 침침해 보이니 쓰지 말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모자를 안 쓰고 나가기에는 머리가 너무 헝클어져 있어서 오랜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빗어 넘겼다. 오랜만에 본 멀끔한 모습이 낯설지만 자신감이 조금 더 든다. 기분도 좋고 말이야. 


항상 시간 촉박하게 외출하는 습관이 있어서 여유 있게 나가려고 했는데 예상치 못한 면도와 머리 정리로 시간이 생각보다 늦어졌다.

부랴부랴 열쇠와 지갑을 챙기고 기차역으로 향한다. 아직 코로나가 활개 치는 상황이라 외출에 마스크는 필수다. 

6시가 넘어가는 햇살이 좋다. 지는 봄 햇살이 맞닿는 모든 것을 순순하게 만든다. 우울했던 지난 며칠에 비하면 기분이 상당히 좋다. 

집 방문 일정이 잡혔다는 것으로 기분이 좋아진 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애써 스스로를 다시 우울한 모드로 넣으려고 하지만 숨길 수 없다. 


도착했다. 집이 상당히 마음에 든다. 월세가 조금 비싸지만 감당할만하다. 집을 안내해 주는 사람은 분명 부동산 회사에서 나온 사람이기에 친근하게 말을 걸고 집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본다. 그 직원은 마스크를 하지 않았다. 상황이 어떤데 마스크도 하지 않다니, 역시나 독일 사람들 주의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관심 있는 세입자가 몇 명이나 되는지 물었다. 12명이라고 한다. 혹시 어떤 사람을 선호하는지 물었다. 자기는 세입자를 선정하는 사람은 아니고 오늘 그냥 문만 열고 방문한 사람들 이름을 적는 역할만 한다고 한다. 젠장. 내가 얼마나 공을 들여서 말을 걸었는데 순간 노력이 물거품이 된 느낌을 받는다. 그래도 나는 어떤 사람이 부동산 회사에서 나올지 전혀 몰랐기에 더 깊이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집 방문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손을 먼저 닦고 마스크를 벗었다. 아, 면도는 왜 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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