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스스로 생각해도 내가 대단하고 생각하는 점이 하나 있다. 그건 내가 못한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거다. 무슨 말이냐면, 음 바이올린을 배운 지 4달 만에 공연(?)을 한 것이다. 말이 공연이지, 그냥 연주를 해봤다는 말이다. '슬로비의 껍질 깨기'라는 타이틀로 강의를 몇 번 했었다. 첫 번째 강의는 아는 분의 동아리에서 초청한 강연이었는데, 2시간짜리 강의를 하다가 중간에 바이올린을 연주한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그때의 영상을 찾아봤는데, 다행히 영상이 있다. 다시 한번 보니 손발이 다 오그라든다. 그 연주를 봐주느라 앞에 계신 분들이 고생했다. 대체 무슨 용기로 그런 연주를 했는지 의아하다. 그런데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아마 또 하겠지. 그때는 그래도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왜냐면 처음부터 잘해서 하는 게 아니라 지금 내 위치를 기억하기 위해서 연주하는 거라고 얘기를 하고 시작했기 때문이고, 내 강의의 콘셉트 상 필요해서 한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연주는 그로부터 7개월 후에 이루어졌다. 친한 분이 도서관에서 강의하게 되었는데, 그 강의에 축하 공연(?)을 하게 된 것이다. 농담 삼아 얘기를 한 것이 그대로 진행이 되었는데, 강의하는 분과 나의 성향이 다소 비슷했기 때문이다. "못하면 어때요? 그건 그런대로 재밌죠. 그냥 그 자체로 좋은 순간이 될 거예요."라고 그분이 말했고, 나도 100% 그 말에 동의했다. 못하면 어떤가? 두 달 동안 열심히 준비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OST를 준비했다. 둘 다 내가 좋아하는 곡이다. 열심히 연습했다. 정말 열심히 연습했다. 그런데, 당일에 완전 긴장이 되었다. 내 강의에서 연주할 때는 실패해도 못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서 마음이 편했는데, 이거 축하 공연은 다르다.(ㅋ 축하 공연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웃기다) 아무튼 난 열심히 연주했다. 긴장 속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나중에 그 자리에 있던 한 분을 우연히 만났는데 그분이 말하길 "신선했어요. 처음엔 공연이라고 해서 되게 잘하시는 분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보는 저희가 더 긴장하는 공연은 처음이었어요."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너무 못했죠? 하지 말 걸 그랬어요."라고 말하자, 그분은 "아니에요. 정말 재밌었고, 감명 깊었어요."라고 하셨다. 적어도 내 느낌엔 그건 빈말이 아니었다. 내 살아 그렇게 긴장한 것이 몇 번 있나 싶을 정도로 긴장했다. 비록 좋은 연주는 아니었지만, 재미난, 열정 가득한, 그리고 보는 사람을 긴장시키는 특이한 연주였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또 하겠지. 분명.
"선생님, 첫날부터 엄청 행복해하셨어요."
바이올린을 처음 배우러 갔던 날을 떠올려보면, 엄청나게 쭈뼛대었던 것 같다. 학원이 있는 아파트 상가 근처에 주차하고, 바이올린 가방을 메고 3층 학원으로 향했다. 문 앞에서 '이거 진짜 해도 되는 걸까?'라고 고민을 하면서 멈칫했던 것을 기억한다. 바이올린을 배우고 몇 달이 지났다. 처음에는 음도 하나도 모르고, 활을 긋는 것도 힘들고 그랬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연주를 하는 것이 스스로 신기할 정도가 되었다. 어느 날 바이올린 선생님이 조금 늦으셔서 원장님과 얘기를 하게 되었다. 원장님이 "요즘 어떠세요?" 뭐 그런 것을 물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에야 좀 재미가 붙는 것 같아요. 배우길 잘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제야 좀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행복해진 것 같다고 할까?" 그렇게 대답을 했다. 사실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이 정확히 나지 않는다. 아무리 기억해내려고 노력해봐도 내가 "행복"이라는 단어를 썼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원장님이 하신 말은 정확히 기억이 난다. 원장님은 웃는 얼굴로 정색하시면서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 첫날부터 엄청 행복해하셨어요. 얼마나 행복한 얼굴로 학원에 들어오셨는데요." 마지막 말은 좀 다를지 몰라도. 앞에 두 말은 정확하다. 내가 첫날부터 그렇게 행복해했었나? 비록 쭈뼜대고, 망설임이 있긴 해도, 그 뒤에 드러난 행복을 원장님은 꿰뚫어 보신 듯하다.
아이를 질투하는 아빠
앞서 말했지만, 다시 한번 말하자면, 큰 애는 여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어제는 한눈에 봐도 어려울 듯한 악보를 대충 보면서 오른손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는데 아주 부러웠다.) 그리고 열 살 때부터 학교 오케스트라에 들어가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매주 월요일 화요일 2시간씩 연습을 하는데, 1시간은 악기별 연습을 하고, 1시간은 합주 연습을 한다고 했다. 일주일에 4시간을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이다. 바이올린 선생님께 레슨도 받으면서, 오케스트라도 하면서. 아내에게 "나, 쟤 너무 부러워", "쟤 대신에 내가 가서 하고 싶어"라고 가끔 말했다. 그러면 아내는 "무슨 아빠가 아들을 질투하냐?"라고 핀잔을 주곤 했다. 아들을 질투하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나? 난 하고 싶은데 못하는 것을 쟤는 하고 있으니 부러워하고 질투하고 시기할 수도 있는 거지. (음 시기까진 아니다. 나 그렇게까지 막 나가는 아빠는 아니다) 아무튼 난 아들이 너무 부러웠다. 가끔 오케스트라가 너무 재밌다고 말하는 아들한테, "야, 너 대신 아빠가 하자."라고 말을 할 뿐이다.
매일 10분씩 연습 다짐
계속 질투만 할 수 없는 법. "그냥 나 아는 곡 하나만이라도 전문가가 돼보자"라고 마음을 먹었다. 내가 계이름까지 완벽하게 외우고 있고, 바이올린으로 끝까지 배운 유일한 그 곡, 동요를 벗어나서 나름 유명한 곡인 "언제나 몇 번이라도"를 마스터하기로 했다. 언제나 몇번이라도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OST이자, 내가 피아노로 처음 배운 곡이고, 두 번의 연주회에 모두 참가했던 곡이다. 다시 바이올린을 꺼내서 조율을 하고(음을 하나도 모르던 내가 조율을 한다. 진짜 대단하다. 물론 스마트폰에 설치된 튜닝기의 도움을 받지만) 연주를 했다. 거의 2년 만에 연주를 해보는데, 그래도 몸이 기억을 하고 있다. 기뻤다. 가물가물하고 헷갈렸던 계이름을 손이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렇게 몇 번을 연습하자 계이름이 다시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었다. "매일 두 번씩만 이 곡을 꾸준히 연습하자"라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혼자서 연습을 시작했다.
다시 시작한 레슨
'바이올린 레슨 받아볼래?'라고 말하면 싫다고만 말하던 아이가 어느 날 '받아볼까?'라는 말을 했다. 자신보다 어린아이가 레슨을 몇 년 받았다고 자신보다 잘하니 경쟁심이 강한 아이로서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아니 인정은 하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멈춰있을 순 없었을 것이겠지. 아이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나는(판박이라 그 심정 누구보다 잘 안다.) 바로 바이올린 선생님을 찾기 시작했다. "아빠와 아들, 주 1회, 집에서, 여선생님, 저녁 타임"으로 숨고에 올렸고, 여러 견적서가 왔다. 그중에 하나를 선택했다. 그리고 레슨이 시작되었다. 레슨은 아이 위주로 진행이 된다. 50분 수업인데, 아이에게 35분~40분, 내가 10분~15분 수업을 받는다. (25분, 25분 동등하게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ㅠㅠ). 아이가 오케스트라에서 배우느라 기본자세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자세를 바로 잡아줘야 한다. 그래서 아이에게 시간을 많이 쓸 수밖에 없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안다. 나도 인정한다. 어차피 아이 덕분에 레슨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난 10분만 하면서 자세를 잡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좋다.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솔직히 조금 아쉽긴 하다. 50분을 온전히 레슨을 받던 것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니깐. 그래도 선생님께 배운 것을 기초로 매일 꾸준히 연습하고 있다. 이제 레슨을 다시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었는데, 예전에 잊어버렸던 기본자세들을 하나하나 다시 배우고 있어서 너무 좋다. 급하게 마음먹을 것이 아니다. 그냥 즐기려고 하고 있다. 그저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너무 좋다.
그저 즐거운, 그냥 그대로 행복한 나의 오티움.
바이올린에 대한 글을 한번 정리를 하려고 했었다. 전에 한 번 쓰다가 멈춘 적이 있는데, 이번엔 연재처럼 쓰기로 정하고 제목을 하나하나 정해가며 써 내려갔다. 쓰면서 느낀 것은 '내가 정말 바이올린을 좋아하는구나'였다. 바이올린을 배우는 그 순간 떠올리며 너무 기뻤고, 오케스트라 연습을 하던 순간을 쓰면서 그때의 행복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바이올린 레슨을 끝내던 날을 쓰면서 혼자 눈물을 흘렸고,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공연을 관객석에서 지켜보던 그 씁쓸함을 떠올리며 가슴이 아려왔다. 다시 바이올린 레슨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큰애 덕분에, 정말 고맙다 아들아) 강사님을 찾을 때 얼마나 설렜던가? 비록 끽끽거리는 소리가 나더라도 연주하고 있으면 마냥 행복했다.
글쓰기도 즐겁긴 하다. 글을 쓰지 않으면 뭔가 찝찝하고, 못 참겠다. 그런데 글쓰기는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강한 의지(또는 압박감)가 있다. 그 압박감 때문에 마냥 즐기지는 못한다. 그림은 그리고 나면 마음에 안 들 때가 많다. 이 역시 잘 그리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 바이올린은 다르다. 못 하면 못 하는 데로 즐겁다.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야 당연히 있지만, 못한다고 자책하지 않는다. 그저 그 순간이 즐겁다. 내가 즐겁게 연주하고, 나의 연주를 보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는 그런 연주자가 되고 싶다. 언젠가 바이올린 하나만 들고 유럽 여행을 떠나는 꿈을 꾸고 있다. 그날이 기다려진다.
나의 오티움, 바이올린(시즌1). 완결.
시즌 2는 언젠가는...
글을 쓰면서 나의 행복을 찾고, 기록했다.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티움 : 결과를 떠나 활동 그 자체로 삶에 기쁨과 활기를 주는 능동적 여가 활동을 뜻하는 라틴어를 뜻하는데, 문요한 정신과 의사의 책 '오티움'을 통해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