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햇살바람 Oct 27. 2020

출산 후 첫 등산

정상에 못 올라도 좋은 것


10개월 아기는 육탄전 육아의 서막인 걸까. 아기가 엄마엄마 하며 기어서 다가오면 전에 없던 긴장감이 생긴다. 서는 연습이 한창인 호야는 요즘 다리를 쭉 뻗어 선 다음 팔을 활짝 벌리고 그대로 날다람쥐처럼 나를 덮치곤 하는데, 타격감이 상당하다. 갑자기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앉아있는 얼굴을 들이받 하고, 안경을 낚아채거나,  머리카락을 쥐어 뜯기도 하며, 6개밖에 없는 이로 내 다리를 야무지게 깨물기도 한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오만상을 찌푸려보지만 아기가 꺄르륵 웃어대니 화를 낼 수도 없다.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오는 호야의 공격을 막아내며 부지런히 영혼이 털리던 와중에 지난 일요일에는, 약 6시간가량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일명 자부데이(자유부인의 날). 엄마가 된 후 못하게 된 일 중에 제일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내 경우는 '청승 떠는 일'이었다. 예를 들면 카페에 혼자 앉아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느끼는 일 같은 것 말이다. 전에는 혼자만의 시간이 넘쳐흘렀는데 지금은 그 시간이 고팠다. 소중한 6시간 동안 뭘 할까 고민하다가 3시간은 등산을, 3시간은 글쓰기나 독서를 해야지 계획하고 가까운 광교산을 찾았다.


등산로 입구.
광교산의 수많은 등산로들.
내가 오른 등산로. 버들치고개까지 갔다 왔다.



거의 1년 만의 산이다. 출산 40일 전, 남편과 용인자연휴양림에 있는 등산코스를 뒤뚱거리며 잠깐 걷다 내려온 게 마지막이었다. 이상하게 임신했을 때 산이 가고 싶었는데, 그때는 '출산해서 몸이 가벼워지면 가야지'라고, 참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광교산은 능선을 따라 많은 등산로가 있는데, 그중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조광조 선생 묘에서 시작하는 길'로 가봤다. 평상시 다니던 익숙한 길 언저리에, 산으로 오르는 길이 나 다. 왜 이제껏 이곳에 등산로가 있다는 걸 몰랐을까? 찻길을 등지고 열 발자국 정도만 걸어 들어갔는데도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가을이 한창이지만 아직 푸른빛을 더 많이 고 있는 산이 금세 나를 안았다.




등산로는 생각보다 경사가 심해, 다리에 힘을 주고 성큼성큼 올라야 했다. 단이 높은 나무계단을 오르거나 나무 사이에 묶인 밧줄을 잡고 올라야 하는 길이 꽤 됐다.


산이 좀 가파르기로서니 오른 지 5분도 되지 않아 다리가 후들거릴 때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출산 전에는 운동하지 않아도 건강했었는데, 출산 후에는 어느 때보다 허약체가 된 기분이다. 30분쯤 지나니 "아이고 허리야" "아이고 다리야" 곡소리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원래 빈혈이 조금 있긴 했지만 경사가 심한 곳을 오를 때는 유난히 어지럽기도 했다. 두세 번 휘청하며 옆에 있는 밧줄을 잡는 내 모습이 어쩐지 낯설고 우스웠다.


이미 산타기가 생활이 되신 듯한 분들이 리듬을 타며 가볍게 산을 오르는 동안, 혼자 백조에 섞인 오리처럼 터벅거리며 느릿느릿 산을 올랐다.


좁은 산길 밑 가파른 낭떠러지. 내려다보면 아찔하다.



몸은 후들댔지만 나무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맑은 공기가 뺨을 스칠 때면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이 가슴 가득 밀려왔다. 나에게 붙은 안 좋은 기운들이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기분 좋게 땀도 송골송골 맺힌다. 흙을 밟아보기 힘든 일상에서 더욱, 산은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축복인 것 같다.


불편한 점을 꼽자면 갈림길이 많아 난처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갈림길이 5개면 표지는 3개 정도였고, 화살표 방향이 헷갈리기도 해서 걷다가 되돌아오기를 여러 번 했다(내려올 때는 결국 길을 잘못 들어, 올라간 곳과 다른 곳으로 내려오기도 했다).


매봉약수터(좌) / 버들치고개(우)



오르는 데 55분이 걸린다고 안내판에 명시되어 있던 버들치고개까지 걷는 데 1시간 반이 걸렸다. 도착해보니 그곳은 등산로의 또 다른 출발지이기도 했다. 시간상으로도 몸의 신호도 오늘은 이 정도만 걷는 게 좋을 것 같아 버들치고개에서 몸을 돌려 산을 내려왔다.


후에 형제봉까지 가지 않았다는 내 말을 들은 남편이 나보고 의지가 약하다고 했지만, 애초에 그런 의지는 (오늘 나에게는) 없었다. 정상(형제봉이 광교산의 정상은 아니지만) 올랐을 때의 성취감을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정상에 올라야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나무나 꽃들은 산 꼭대기에 앞다투어 자라는 일이 없다. 정상에서 느낄 만족감은 다음으로 미뤄둬도 충분했. 


언제쯤 또 산을 찾을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누군가 아기를 봐주지 않으면) 등산도 할 수 없는 게 아기 엄마라는 생각에 약간은 씁쓸해진다. 그래도 언젠가 다음은 올 테니까 그때는 등산화 같은 복장을 좀 더 갖춰야겠다는 욕심을 부려본다.


밤에는 무릎이 아파 끙끙거리며 잠이 들었다. 아픈 무릎은 그날 본 나무와 흙들을 생각나게 했다.


흙을 원 없이 밟아서 행복한 날.



매거진의 이전글 열 나는 아기, 허둥대는 엄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