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3월 초 치고는 날씨가 따숩던 날, 남편과 호야와 함께 돗자리를 들고 집 앞 호수공원에 갔었다. 자리를 펴고 아기랑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조금 위쪽에 있는 모래 놀이장을 발견했다. 여러 번 같은 장소에 갔었지만 근처에 그런 곳이 있는 줄은 그날 처음 알았다(아기를 낳기 전에는 봤어도 별로 신경을 안 썼던 것 같다).
모래를 보고 반가워서 아기와 함께 한달음에 달려갔다. 빈자리가 거의 없었지만 한쪽에 자리를 잡고 호야와 함께 모래를 조몰락거리며 놀았다. 호야가 모래를 입으로 가져갈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먹어보고 싶은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처음 만져보는 모래가 신기한지 모래를 쥐었다가 팔을 흔들어서 털고, 손 사이로 흘려보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어릴 적엔 모든 놀이터에 모래가 깔려 있었는데. 모래로 소꿉놀이도 하고 맘껏 구르며 놀았던 기억이 난다. 놀이기구도 몇 개 없는 놀이터에서 하루 종일 놀다가 집에 들어가곤 했는데 지금은 관리상의 문제로 모래를 쓰지 않는다니 아쉽다. 모래 놀이터가 그리운 건지 하루 종일 아이들이 뛰어놀던 시절이 그리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날은 계획에 없던 모래놀이였기 때문에 별다른 도구가 없었다. 다 먹고 빈 일회용 컵이 유일한 장난감이었다. 옆에서 삽 등을 이용해 큰 성을 만들고 도랑을 파는 것에 비해서 꽤나 소박했다. 그래도 호야랑 마주 앉아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호야는 컵에 모래를 넣어보기도 하고 꺼내서 다른 곳에 옮겨보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온 다음날 바로 모래놀이 장난감을 샀다. 다음에는 호야와 더 신나는 모래놀이를 할 수 있겠다는 기대를 하며 주말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얄궂게도 시간이 되는 주말마다 여지없이 비가 내렸다. 평일에는 날씨가 좋다가도 주말만 되면 비가 오는 날이 한 달을 이어졌다. 집돌이인 남편은 맘속으로 쾌재를 불렀겠지만.
모처럼 미세먼지 없이 맑은 날, 남편이 육아시간을 썼다. 나는 더 기다릴 수 없어 모래놀이 장난감을 차에 실었다. 오후 4시에 호야와 남편을 어린이집과 직장에서 차례로 픽업한 후 그대로 호수공원으로 내달렸다.
모래 놀이장에는 오늘도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나는 한 달 동안 벽장에 묵혀놨던 장난감을 모래 위에 와르르 쏟았다. 남편과 둘이서 장난감으로 모래를 파고, 쌓고, 찍으며 호야에게 현란한 모래의 세계를 보여주려 용을 썼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일까. 10분 동안 모래에 관심을 보이던 호야가 흥미를 잃었는지 다른 곳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모래 갖고 놀자고 설득해도 소용없었다. 할 수 없이 모든 장난감을 다시 주워 담고, 뛰어다니는 호야를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네가 하고 싶었던 게 이거냐?" 남편이 원망의 눈길로 나를 쳐다봤다.
"맘처럼 안 되네." 모래놀이가 하고 싶은 건 나 혼자뿐이었나보다. 호야는 뭘 탐색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잔디밭 위를 뛰어다니다가 큰 돌 위를 기어오르고, 돌길 위를 뛰다가 바닥에 있는 나뭇가지를 줍고 휘둘러대는 등 맥락 없는 달음질을 이어갔다. 그러는 동안 남편과 나는 호야가 넘어지거나 다치지 않도록 쫓아다니고 붙잡느라 기진맥진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오후의 호수 풍경이 너무 예뻐서 벤치에 잠깐 앉았지만 호수 쪽으로 맹렬히 돌진하려는 호야 때문에 풍경을 즐길 새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장난감을 넣어놓은 주머니에서는 달그락달그락 처량 맞은 소리가 났다.
오늘도 호야 덕분에 예상할 수 없는 하루를 보냈다. 이토록 지루하지 않은 일상이라니. 다음에는 모래놀이에 관심을 가져주려나. 떨리는 마음으로 다음을 기약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