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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바람 Jun 04. 2021

당연하게 얻어지는 건 하나도 없다

생후 17개월 때의 기록


그저께 밤에는 호야가 새벽 3시 반에 깨서 울었다. 그날은 내가 퇴고를 하느라 새벽 2시에 잠든 날이라 눈도 못 뜨고 호야를 이리 달래고 저리 달랬다. 너무 졸려서 남편이 아기를 한 시간 봐줄 동안 쪽잠을 자기도 하고 아기를 보면서 졸기도 했다. 호야는 울음은 곧 그쳤지만 잘 생각이 없는지 밤을 하얗게 새웠다.


어제 혹시나 하고 확인해보니 역시나 14번째 이가 뿅 나와 있다. 생후 12개월부터 한동안 앞니 8개만 있다가 16~17개월에 6개가 줄줄이 나면서 이제는 잇몸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높이가 들쭉날쭉인 이가 조로록 나 있다. 이가 하나 날 때마다 아기는 예외 없이 자다 깨서 밤을 지새운다. 하룻밤이면 끝난다는 게 다행스럽긴 하지만 이앓이 없이 지나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늘 밤은 안 잘 거예요. 이가 아프니까요.



아기를 낳고 종종 생각한다. 내가 지금 누리는 것들 중 당연하게 얻은 건 하나도 없다는 걸. 인간은 정말 아무것도 못 하는 상태에서 태어난다는 사실에 놀란 게 한두 번이 아니다(그렇다 처음엔 혼자 잘 줄도 모른다). 인간이 태어나자마자 할 수 있는 건 딱 네 가지였다. 숨 쉬는 것과 눈을 깜빡이는 것과 우는 것과 싸는 것. 생존을 위한 빨기 능력도 갖고 있었지만 잘 못 먹을 때도 있어서 아기가 잘 먹게 하기 위해 별도의 노력을 해야 했다. 한동안은 목을 가누지도 못하기 때문에 남편이 아기를 안을 때마다 "목 조심해. 목 꼭 받쳐야 돼." 하고 매번 잔소리를 했던 기억이 난다.


아기가 옹알이를 시작하고 뒤집고 걸을 때마다 하나씩 능력을 갖춰가는 모습에 감동했지만 제일 큰 감동을 받았던 순간은 아기가 스스로 젖병을 잡고 분유를 먹을 때였다. 생후 7개월 때 아기가 혼자 할 수 있도록 몇 번 시도해보니 곧잘 젖병을 들었다. 그전에는 아기를 안고 분유를 다 먹인 다음 그다음 일을 해야 했지만 그날은 아기가 분유를 먹는 동안 아기가 목욕했던 통을 치우고 바닥에 떨어진 물을 닦는 등 다른 일을 할 수 있었다. 그건 아기와 분리를 느낀 첫 경험이었다.


처음 젖병 잡고 먹을 때. 이날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두 번째로 아기와 분리를 느낀 감동의 날은 호야가 빨대컵으로 처음 물을 마신 날이었다. 그전에는 몰랐다. 젖병을 빠는 것과 빨대컵을 빠는 방법이 다르다는 걸. 주기만 하면 쭉쭉 잘 빨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기는 빨대컵을 붙잡고 한참을 헤맸다. 처음으로 아이에게 무언가를 의식적으로 연습시켜본 것 같다. 다른 일들은 일부러 유도하지 않아도 아기가 스스로 알아서 연습을 했다. 목을 가눌 때가 되면 열심히 목을 들었고, 배밀이 때가 되면 온종일 슈퍼맨 자세를 했고, 뒤집을 때가 되면 몸을 뒤틀었고, 길 때가 되면 궁둥이를 씰룩거렸다. 하지만 빨대컵은 달랐다. 어쨌든 빨대컵을 쥐어주는 정도의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유모차 산책을 나갈 때마다 빨대컵을 쥐어줬다. 어떤 아기는 빨대컵을 금방 사용한다던데 호야는 빨대컵으로 물을 마시기까지 두 달이 걸렸다. 빨대컵을 사용하게 된 후로는 물을 떠먹여 줄 필요가 없어져 한결 손이 덜 갔다.


빨대컵 첫날과 능숙해진 어느 날. 지금은 일반 컵 쓰는 연습을 시작했다.



아기와 지내면서 내가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을 돌아보게 된다. 길을 걷고 음식을 먹는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일들 중 처음부터 할 수 있었던 건 아무것도 없었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다 시간이 필요했고 노력이 필요했다. 인간은 그 모든 과정을 거친 존재들이다.


또 지금의 나는 성인이라는 이유로 뭔가를 얻는 과정에서 힘이 들 때 그것을 너무 자책하지는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아기는 이가 하나 날 때도 밤을 꼬박 지새우는데 말이다. 이앓이가 당연하듯 모든 성장에는 괴로움이 동반되는 게 아닐까 싶다. 아기처럼 맘껏 우는 게 정상일지도 모른다. 언제 그랬냐는 듯 말짱해지는 날이 금방 올 테니까.


이앓이 때는 아니고 그냥 슬플 때. 우는 것도 귀여운 네 이름은 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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