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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바람 Nov 15. 2021

퇴근 후 육아 출근

생후 23개월 때의 기록


오후 5시 58분. 퇴근 2분 전. 재빠르게 퇴근 준비를 다. 모니터에 띄워놓은 창을 모두 닫고,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전부 서랍에 넣었다. 어쩐지 가슴이 답답했던 하루가 드디어 끝났다. 6시가 되기가 무섭게 행정복지센터를 빠져나와 종종걸음으로 차에 올랐다.


칼퇴에 성공한 차들이 몰려 이 시간이면 늘 고만고만하게 차가 막힌다. 나도 그 틈에 껴서 부지런히 차를 몰았다. 호야가 있는 본가로. 오늘은 친정부모님이 4시에 호야를 어린이집에서 하원 해 주신 날이다. 내가 호야를 데리러 갈 때까지 2시간 반 동안 호야를 봐주신다.


"엄마 왔다~" 

호야가 반갑게 맞아주길 기대하며 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호야는 (아마 엄마보다 더 좋을) 장난감 통을 손에 쥐고 소파에 편하게 앉아서 눈으로만 나를 맞았다. 내가 기대한 반응은 아니었지만 엄마 없이도 잘 지내주는 게 그저 고맙다.


집에 돌아와서는 남편이 퇴근길에 사놓은 떡볶이와 샌드위치로 저녁을 먹고, 호야가 먹다 남겨서 가져온 밥을 마저 먹였다. 요즘엔 다시 의자에 앉아서 밥을 잘 먹는데, 직접 숟가락질을 안 한 지는 또 한참 됐다. 스스로 할 수 있게 도와줘야 되나 고민하다가 밥만 잘 먹으면 됐지 하고 부지런히 떠먹였다. 혼자 할 수 있게 기다려주는 엄마가 되겠다던 포부는 어디로 갔는지. 스스로 하는 연습은 두 돌 이후부터 하려고 미루는 중이다(배변훈련도 그때...). 요즘엔 일반 컵도 곧잘 쓰니까 두 돌이 지나면 빨대컵도 졸업시켜야겠다. 조금씩 클수록 손이 덜 가서 편하긴 한데 못내 아쉽기 하다.


흥이 많은 호야는 오늘도 노래를 흥얼거리며 이곳저곳을 방방 돌아다녔다. 요즘엔 '바나나 차차' 노래에 꽂혔다.

"바나나 차차, 바나나 차차"

하는데 "차차" 부분이 아주 우렁차다. '손가락 가족', '작은 동물원', '개구리송', '엄마 돼지 아기돼지' 등 애창곡을 쭉 불러 젖히는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엄마 아빠를 번갈아가며 덮치는 통에 남편과 나는 얼마 안 있어 널브러졌다. 호야의 그 작은 몸에 어찌 그리 에너지가 넘치는지 항상 놀랍다.


응가 싼 기저귀를 갈고, 목욕을 시키는 동안 밤은 점점 더 깊어졌다. 호야는  10시 반이 돼서야 잠이 들었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잔뜩인데 눈이 따갑고 잠이 쏟아진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는 건 영원히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진다.


영화 <아가씨>를 제대로 본 적은 없지만 거기에 나오는 대사 중 잊히지 않는 게 있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처음 들었을 때는 참 말도 안 되는 문장이라고 생각했는데(인생을 망쳤는데 구원자라고?) 호야를 낳은 이후로 저 말이 퍽 애틋하게 들린다. 호야 이전의 삶은 분명 망가졌지만 호야가 가져다준 행복이 이전과 비할 바 없이 크기 때문이다. '인생을 망친 구윈자'는 말이 되는 소리였다. 하나의 인생이 망가지고, 다른 인생이 시작됐다.


사과 뇸뇸. 엄마 하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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