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별다른 계획은 없었다. 평상시 같았으면 새해니까 일출을 보러 가자고 남편을 졸랐겠지만 호야가 일주일째 열감기에 중이염으로 아픈 탓에 어디 갈 계획은커녕 요 며칠간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2022년 새해를 이렇게 싱겁게 맞이할 줄이야.
2021년 마지막 날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아픈 호야를 보살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열이 또 38도까지 올랐고, 콧물에 기침도 여전했다. 이제 슬슬 나을 때가 됐는데 차도가 없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난다. 이번 주말에는 나아야 할 텐데. 아픈 아기를 두고 출근하는 건 너무 힘들다.
집의 온도와 습도를 올리기 위해 난방 온도를 최대한 올리고 가습기를 튼 데 더해 냄비에 물을 가득 붓고 팔팔 끓였다. 물이 끓는 소리와 함께 온도와 습도가 조금씩 올라가 적정 수치가 됐다. 호야는 아빠랑 목욕을 하고 나와 거실 매트에 앉아 한참 동안 아이패드로 보여주는 뽀로로를 봤다. 평소에는 3편만 보여주는데 아플 때는 한 번쯤 질릴 때까지 보여주는 편이다. 아픈데 뽀로로라도 실컷 보라는 남편의 말에 어쩐지 수긍하게 되면서부터다. 그렇게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물 끓는 소리와 뽀로로와 함께 보냈다.
아침에 남편이 새로 처방받아 온 약이 쓴지 약 먹이는 데 한바탕 난리를 치른 뒤 호야는 졸린지 침대에 누웠다. 평소였으면 잠들 때까지 지친 기색도 없이 엄마를 끌고 돌아다녔을 텐데 가만히 누워 눈만 깜빡거리는 호야를 보니 맘이 짠했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한 장면처럼 얼마간 호야랑 서로 마주 보고 누워 있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대로 스르륵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아침 6시 반이었다. 2022년 새해는 보신각 종도, 일출도 없이 지나갔다. 핑거푸드를 곁들여 남편과 와인을 홀짝이며 보신각 타종 소리를 들으리라 상상을 했었는데 상상으로만 남았다. 허전하고 아쉽지만 이것대로 괜찮지 않나 하고 생각을 고쳐본다. 새해맞이가 싱거운 게 뭐 대순가.
호야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틈을 타 책상 앞에 앉았다. 잠시 동안 지나간 2021년을 돌아봤다. 나름 스스로에게 의미 있는 변화가 있었던 한 해였다. 책을 68권 읽었고, 브런치에 136개의 글을 발행했고, 독립출판도 했다. 또 달리기를 시작했고, 제로웨이스트의 연장선으로 '유연한 채식'에도 발을 들였다.
2022년을 기다리고 있는 두 권의 다이어리를 보니 마음이 흡족해진다. 다이어리나 노트를 워낙 좋아하는 성격이지만, 일할 때 쓰는 다이어리 외에 다이어리 두 권을 같이 쓰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 권은 '갈무리 다이어리', 한 권은 '글책 다이어리'로 이름 붙였다. 갈무리 다이어리는 그날의 이벤트와 특이사항, 그리고 to do list를 적는 용(원래 쓰던 용도)이고, 글책 다이어리는 이런저런 메모를 해보려고 따로 마련했다.
새해에는 버킷리스트 100개를 정해서 해보려고 하는데 100개를 생각해내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이제 겨우 27개를 적었다. 가장 큰 목표는 '책 100권 읽기'와 '매일 글 써서 글 100개 발행하기'이다. 그 외에 작년에 달성하지 못했던 '10K 1시간 안에 완주하기'가 다시 들어갔고, '66% 채식하기', '판관기 필사하기', '칵테일 만들어보기', '헌혈 5번 하기', '아이키 공연 보러 가기', '독립서점 가서 시간 보내기', '100일 글쓰기 성공하기', '호야랑 별 보러 가기' 등이 있다. '혼자 북스테이 가서 1박 2일 머물다 오기' 같은 야심 찬 바람도 적었다. 이루지 못할 것 같아도 적는 것만으로 행복해진다.
이제 내년이면 마흔이다. 서른이 될 때는 별 생각이 없었던 것 같은데, 마흔은 어쩐지 묵직한 나이로 느껴진다. 마흔에는 좀 더 큰 꿈을 적고 싶다. 타인과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 올해를 가능한 한 후회 없이 보낸다면 그 바람을 조금이나마 이루지 않을까 싶다. 그런 희망으로 2022년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