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두 번째 산티아고 길을 다녀온 지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마침 한국에 '천주교 서울 순례길'이 생겼다. 아시아 최초로 교황청 승인을 받은 순례길이라고 한다.
서울 순례길을 산티아고 순례길 같은 관광명소로 발전시킬 계획이란 기사에 더욱 이 길이 궁금해졌다. 결국 서울 순례길 위에 서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바닥에 '천주교 서울 순례길' 표시가 있지만 사람이 많은 도심이라 찾기가 쉽지 않다
서울 순례길 1코스 (말씀의 길)
걸은 날: 2018.9.17
루 트: 명동성당~김범우의 집 터~이벽의 집 터~좌포도청 터~종로성당~혜화동 성당
길 이: 7.9km
걸은 시간: 3시간 30분
천주교 서울 순례길은 3개의 코스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길이가 44.1km이다. 1코스의 출발지인 명동성당으로 가는 길에 '서울 순례길' 앱을 깔았다.
명동성당 성물방에 들러 순례길 리플릿을 사고(당시 2500원이었다), 오후 3시 40분에 길을 걷기 시작했다. 리플릿에 기도 지향 카드가 있길래 출발하기 전에 간단하게 기도 지향을 적었다.
길이 흙길이 아니고 포장된 길이다 보니, 많이 걷지 않았는데도 금방 지쳤다. 게다가 순례길임을 알려주는 표시가 바닥에 있긴 했지만 인파에 가려지기 일쑤라 모든 길을 카카오 맵에 의지해 걸어야 했다.
김범우의 집 터, 이벽의 집 터, 좌포도청 터, 종로성당까지 지난 다음 근처 광장시장에 들러 끼니를 해결했다.
1코스에서 지나온 곳들이 대부분 '~터' 였는데 남아있는 흔적은 없고 위치를 알 수 있는 비석뿐이라 복잡한 도시 속에서 숨어있는 비석을 찾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광장시장을 나와 다시 순례길을 걸었다. 광희문을 지나 1코스의 마지막 장소인 혜화동 성당에 도착했지만 문이 닫혀 있었다. 리플릿을 보니 성소자 양성 공간이라 개방이 어렵다고 적혀있었다.
비석을 겨우 찾아냈다
광장시장에서 먹은 마약김밥과 빈대떡
서울 순례길 2코스 (생명의 길)
걸은 날: 2018.9.19
루 트: 가회동 성당~광화문 시복 터~형조 터~의금부 터~전옥서 터~우포도청 터~경기감영 터~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죽림동 약현성당
길 이: 5.9km
걸은 시간: 3시간
2코스를 걸으려고 준비하다가 '서울 순례길' 앱에 나와 있는 코스랑 리플릿에 나와 있는 코스가 조금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1코스 때 혜화동 성당에서 끝났던 건 리플릿에 나온 길이었고 앱에는 혜화동 성당 이후에 가회동 성당까지 더 걷도록 되어 있었다. 오늘부터는 앱에 나온 루트를 따라 걸었다.
가회동 성당에서 오후 4시 반에 출발했다. 다소 늦은 시간이었지만 6km밖에 되지 않는 길이라 부담이 없었다.
1코스와 비슷하게 숨은 비석을 찾아다니는 기분이었다.
2코스의 출발지 가회동 성당
서울 순례길 3코스 (일치의 길)
걸은 날: 2018.9.20
루 트: 약현성당~당고개~새남터~절두산~노고산~용산신학교 성당~왜고개~삼성산
길 이: 29.5km
걸은 시간: 11시간 30분
9시 40분 출발. 비가 조금 내렸다.
3코스는 1, 2코스와 달리 길이가 부쩍 길어진다. 1, 2코스는 10km도 되지 않는데 3코스의 길이는 30km에 이른다. 게다가 성지도 6곳이나 포함되어 있어서 오래 머물고 싶은 곳들이 많았다.
이유는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29.5km나 되는 길을 하나의 코스로 묶은 점이 못내 아쉬웠다. 마음이 급하니 걸음에도 여유가 사라지고 성지에 들러서도 쫓기듯이 다음 목적지로 이동했던 것 같다. 3코스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든지, 나처럼 도보로 이동하고 싶다면 두세 번으로 나눠서 걷는 게 좋을 것 같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더라도 새남터부터 절두산에 이르는 한강 길은 놓치지 마시길.
왜고개 성지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미사 중이었다. 미사를 드린 후 고해성사를 봤는데 신부님이 주신 보속에 뒤통수를 맞은 듯 놀랐다. 지금은 고해를 드린 내용도, 어떤 보속이었는지도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구했던 답을 이곳에서 찾은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옆에 계신 주님을 찾아 너무 멀리 헤맸구나' 생각했다.
코스가 긴 탓에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을 떨었지만 왜고개에서 이미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삼성산에 도착했을 땐 사방이 어둠에 잠겨 입구에서 순례를 마쳐야 했다.
3코스의 출발지 약현 성당
길을 걷다 크루아상이 맛있어 보이는 카페에 들렀다
서울 순례길은 기대를 많이 해서 그런지 실망도 있었다. 도심 한복판에 있는 길이라 다소 산만했고, 흙길이 아니라서 내딛는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지기 때문에 피로감이 컸다. 한편으론, 무심코 지나다니던 길 곳곳에 신앙의 자취가 있었다는 것이 뭉클하게 와 닿기도 했다.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닿아 이미 오랜 역사가 쌓여있는 산티아고 길과 이제 막 생긴 서울 순례길이 완성도(?)가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찾아주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 발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산티아고 길을 애써 모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 고유의 길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산티아고 길이 그리울 때 서울 순례길을 찾아가 걷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행사가 있는 순교자 성월(9월)에 맞춰 이 길을 걷는다면 의미에 더해 재미까지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글을 쓰며 돌아보니 다시 찾아가 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육아 중이 아니었다면 마스크를 끼고 걸으러 갔을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호야랑 같이 걸을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을 것 같다. 그때엔 코로나 바이러스 같은 위협이 없는 안전한 세상이길 바라며.
< 2020년 행사 안내 >
'천주교 서울 순례길'은 2018년 9월 14일에 교황청 승인 국제 순례지로 선포되었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매년 9월 순교자 성월에 다채로운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올해 8월 15일부터 9월 27일까지 '천주교 서울 순례길'의 세 코스를 걸으면서 성지 24곳의 스탬프를 모두 찍어 순교자 성월을 닫는 미사(9월 27일,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에 참석해 제출하면 축복장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http://m.cpbc.co.kr/news/view.php?cid=785109&path=202008)
순례자 여권은 명동 서울대교구 역사관, 새남터 순교성지 등 11곳의 지정 기부처에서 5000원 이상 기부하고 구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