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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Jun 03. 2020

아내의 된장찌개국

사랑의 푸드 로드 (Food Road) - 미각을 잃고 행복을 얻다.

 아내와 나는 아직 소년, 소녀의 순수함이 남아있던 조금은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다. 내가 스물아홉, 아내는 스물일곱이었다. 5월의 신록 같은 풋풋함과 발랄함이 육체와 정신을 다스리던 눈부시게 아름다운 나이었다. 누군가가 아홉수에는 결혼을 하지 않는 법이라며 미신을 들먹이기도 했지만, 인생의 첫 번째 목표가 서른이 되기 전에 결혼을 하는 것이었으므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아갔다. 사실 그때의 나는 혼자서 30대를 맞이할 용기가 없었다. 지금은 세월이 남기고 간 생채기로 무뎌진 탓에 별일 없이 훌쩍 40대를 넘어 50대로 담담하게 나아가고 있지만, 아직 철부지였던 그때의 나에게 30대는 감당하기 힘듦 그 이상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함께 하고 싶었고, 그것이 내가 20대의 미로를 빠져나와 30대라는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아내와의 결혼은 내가 선택한 일중 가장 잘한 일이며, 유일하게 성취한 삶의 목표가 되었다. 그리하여 누구보다 행복한 30대의 새 날을 맞이할 수 있었다.  


 아내를 만난 것은 대학생 때였다. 당시 나는 별 볼 일 없는 복학생, 아내는 (자칭) 인문대 최고의 퀸카로 '예쁨 예쁨' 열매를 먹고 한 미모를 뽐내는 유난히 눈에 띄는 후배였다. 말년 휴가를 나와 수강신청을 하고 전역 다음 날부터 수업을 듣느라 학교 적응이 만만치 않았던 나에게도 과 방이나 게시판 앞에서 몇 번 마주쳤던 아내의 첫인상은 한여름 쏟아지는 장맛비처럼 꽤나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이렇게 부부의 연(緣)으로 이어지게 될 운명이었는지 아내가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것인지) 선뜻 나에게 말을 걸었고, 그 인(因)으로 대학시절 내내 무척 친한 선후배 사이로 지내게 되었다.


 나는 아내를 좋아했지만 한 번도 표현하지는 않았다. 섣부른 고백이 오히려 우리 관계에 해가 될까 두려웠다.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영롱하고 7월의 수국처럼 시원스럽게 아름다운 그녀를 향한 내 자격지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의 관계는 딱 거기까지였다. 게다가 내가 먼저 졸업을 하고 지방에서 취업을 하게 되었고, 일 년 후 졸업한 아내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만나게 될 사람은 언젠가는 만나게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갑작스레 내가 서울로 발령을 받게 되었고,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았던 우리의 인연이 비로소 다시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약 2년 후 우리는 한 집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자며 함께 아침을 맞이하는 사이가 되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첫 출근을 하는 날 아침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난 아내가 분주하게 아침상을 차려 주었다. 손바닥만 한 아파트에서 시작한 신혼살림이라 식탁이 들어올 자리도 없었기에 작은 밥상 하나가 식탁 역할도 했다가 책상 역할도 했다. 그 밥상에 아내가 푸짐하게 한가득 아침밥을 차려 주었다. 아내는 출근하는 나를 위해 자신의 손으로 직접 밥을 지어 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임금의 수라가 부럽지 않았다. 눈앞의 작은 밥상이 백 첩 반상으로 보였다. 나는 감동의 물결에 떠밀려 아내가 차려준 달걀부침이며 밑반찬을 설거지가 필요 없을 정도로 깨끗이 비웠다. 세상에서 제일 달달한 아침밥이었다. 


 하지만 당시 아내도 출근을 하는 직장인이었기에 혼자 일찍 일어나 아침을 준비한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나는 오늘 차려준 아침으로 충분하니 앞으로는 이런 수고를 하지 말라고 아내에게 당부했다. 아내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이고 이 정도는 충분히 해 낼 수 있다며 쉽게 뜻을 굽히지 않았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 군 복무 시절까지 아침밥을 거르는 것이 습관이 되어 오히려 아침을 먹으면 속이 부대끼니 간단하게 우유나 주스 한 잔으로 충분하다는 말로 겨우 아내를 설득했다.  


 모든 일은 이날 시작되었다. 그 말이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되어 후에 태풍이 되어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맞벌이 부부였던 우리는 주중에는 거의 함께 식사할 일이 없었다. 야근과 휴일 근무가 많았던 나는 거의 모든 끼니를 밖에서 해결하고 왔다.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아진 아내도 나의 부재를 막대한 운동량으로 대신했기 때문에 (당시 아내의 복근에는 내가 평생 가져보지 못한 식스팩이 있었다.) 혼자 한 상 차려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기보다는 간편식으로 끼니를 때웠다. 주말에는? 대부분 여행을 가거나 함께 취미활동을 하다 보니 역시 집에서 밥을 해 먹는 일이 매우 적었다. 게다가 요리에 있어 장인(匠人)의 경지에 이르신 장모님이 국이며 반찬을 만들어 번번이 냉장고를 채워 주셨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내가 음식을 만드는 일이 거의 없게 되었다. 아내의 금손을 연마(硏磨)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아내가 본격적으로 요리(料理)의 세계에 입문한 것은 준과 큐 형제를 낳은 후부터다. 아이들의 이유식이며 간식을 직접 만들며 그 세계에 눈을 떴다. 이때부터 우리 집에 등장한 풍경 하나는 식사 준비를 하는 시간이면 주방에 꼭 한두 권의 요리책이 펼쳐지는 것이었다. 점점 식탁 한편에 요리 관련 책이 수북이 쌓여 갔다. '용장 밑에 약졸 없다'는 속담처럼 장모님의 솜씨를 물려받은 아내의 손맛은 날로 세련되고 우아해져 갔다. 어떨 때는 매우 시험적이며 아방가르드적인 음식이 탄생하기도 했다. 문제는 아내의 음식에 대한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이 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아내의 초기 작품, 담백함과 소박함이 느껴진다.>

 하루는 아내가 시원한 조개 미역국을 끓였다. 바다향이 느껴지는 그 맛이 일품이라 반을 덜어 처가에 갖다 드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그토록 맛있게 먹은 미역국을 장모님은 너무 비려서 드시지 못했다고 한다. 의사표현 능력이 확실해진 준과 큐 역시 맛에 있어서는 냉정했다. 몇 시간 동안 공을 들여 만든 음식을 먹어보고는 "엄마 맛이 이상해." 하며 입도 대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옆에서 맛있게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후 아이들을 따로 불러 '착한 거짓말' '사회생활하는 법'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런 날이면 '아내의 날씨'는 매우 흐림이 되었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집안에 내리치는 느낌이랄까. 그럼 나는 요리를 향한 아내의 열정이 사그라들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더욱 열심히 먹었다. 그냥 액션이 아니었다. 실제로 내 입에는 최고의 맛이었다. 아내는 어떤 요리를 만들던지 화학조미료를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국이나 찌개를 만들 때는 직접 육수를 내었다. 건강하게 만든 최고의 음식들이 맛없을 이유가 없었다. 


 이런 이야기들이 쌓여 갈 때마다 아내의 요리 목록도 늘어갔다. 카레를 시작으로 미역국, 닭곰탕, 닭볶음탕, 김치찜, 김치찌개, 수육, 삼계탕, 배춧국 등등 웬만한 요리는 거침없이 만들었다. 언젠가부터 요리책도 주방에서 사라졌다. 만드는 시간도 훨씬 짧아졌다. (드디어 하루 세 끼가 가능해졌다. 이론적으로는.) 아이들이 진심으로 맛있게 먹는 음식들도 제법 많아졌다. (결코 사회화의 산물이 아니다.) 아내의 요리를 향한 담대한 여정은 이제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거침없는 열정이 향한 곳은 바로 한국인이 가장 많이 먹고 좋아하는 된장찌개였다. 가장 흔한 음식이지만, 결코 쉽게 그 맛을 내어주지 않는 우리네 식단 최고 난이도의 영역! 

<된장찌개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된장찌개는 아닙니다만.>

 혈육을 해친 원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평생을 무예 수련에 바친 무도가의 결기가 느껴지는 날, 아내는 마침내 그 영역에 도전했다. 먼저 북어 대가리와 껍데기, 디포리, 말린 홍합, 파뿌리와 무로 육수를 냈다. 육수가 끓는 동안 함께 넣을 두부와 애호박, 버섯과 감자 등을 순식간에 다듬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유명 포장마차 안주보다 두툼하고 맛 좋은 명란 계란말이와 텃밭에서 방금 따온 싱싱한 채소들로 상큼한 샐러드도 준비했다. 혹시나 (그럴 일이 없겠지만) 있을지 모를 실패를 대비해 플랜 B로 삼겹살 구이도 준비했다. 이 모든 과정이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음식을 준비하고 만드는 동작 하나하나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명쾌했다. 아이들은 할머니(장모님)가 만들어 주시던 맛있는 된장찌개를 엄마가 직접 만들어 준다는 사실에 들떠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모든 준비는 끝났다. 떨리는 마음으로 식탁에 앉았다. 그 옛날 작은 밥상에 둘이 마주 앉아 식사를 했는데 어느덧 가족이 네 명으로 늘어났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 풍경에 익숙해지면서부터다. 드디어 식탁의 한가운데 오늘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아이들은 박수를 치고 아내는 짠하며 뚜껑을 열었다. 정말 먹음직스러운 된장찌개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아내는 약간 고개를 갸우뚱하며 국그릇에 찌개를 담아 주었다. 국그릇을 받고 보니 아내의 의아해함이 이해가 되었다. 찌개라고 하기에는 조금 넘치고, 국이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한 그 경계의 어딘가에 있을 법한 하이브리드(hybrid)한 작품이었다.   


 "이거 된장찌개국이네."


  어색한 침묵을 깨고 내가 말했다. 된장찌개이면 어떻고, 된장국이면 어떤가. 누군가가 정해 놓은 틀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아내의 된장찌개국은 건강하고 품격 있는 맛이었다. 적당히 익은 감자와 호박을 뜨끈한 국물과 함께 한 입 떠먹으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내 반응을 기다리던 아이들도 얼른 숟가락을 들어 맛을 보았다. 준은 국물을 입에 머금고 엄마를 향해 엄지 척을 날렸다. 비교적 솔직한 큐는 좋아하는 두부만 건져 먹었다. 그제야 아내도 한숨 돌리며 자신이 만든 작품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들 즐겁게 식사를 하는데 갑자기 아내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이거 너무 맛이 없다." 


 나도 아이들도 매우 당황했다. 우리 집의 절대군주로 어떤 일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강한 모습을 보이던 아내가 자기가 만든 음식이 맛이 없다고 운 것은 처음이었다. 온갖 정성을 기울여 만든 음식이 자신에게도 만족스럽지 못했나 보다. 나와 준은 정말 맛이 좋다며, 이 정도면 훌륭하다고 아내를 달랬다. 이미 한 그릇을 싹 비우고 다시 수북이 담아 이렇게 맛있게 먹고 있지 않냐고. 그런데 옆에 있던 큐가,


 "아, 다행이다. 엄마랑 생각이 같아서."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날 이후로 아내는 절치부심(切齒腐心)하고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완벽한 된장찌개국을 만들기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육수에는 딱새우'라는 필살기를 터득해 그 여정을 매듭지었다. 이제 된장찌개국은 아내가 자랑하는 시그니처 메뉴가 되었다. 


 17년 간의 결혼생활을 통해 나는 미각을 잃고 가정의 행복을 얻었다. 아내가 만들어 주는 음식이라면 모든지 잘 먹고, 맛있게 먹어 아내의 요리 열정에 든든한 불쏘시개가 되고 있다. 그러다 가끔 생각해 본다. 그때 아내가 해주겠다던 아침상을 마다하지 않았다면 미각과 행복 두 가지 모두를 얻을 수 있었을까 하는. 그러면 허툰 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리고 이제 나는 안다. 매일 가족을 위해 아내가, 우리의 어머니들이 해왔던 고민과 그 속에 담긴 마음을.   


 "오늘은 뭐해 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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