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삶의 진리는 참으로 단순하다
중문 관광단지는 관광자원이 풍부한 천혜의 섬 제주의 자연환경과 지리적 조건을 결합해 세계적인 휴양지로 개발하고자 1978년부터 서귀포시 중문, 대포, 색달동 일원에 조성된 초기 제주 관광의 심장이었다. 아직 아이들이 아장아장 걷던 시절에는 가족 여행 대부분을 중문에서 보냈다. 다양한 숙박 시설을 포함해 각종 편의 시설과 볼거리, 먹을거리가 풍부했기에 유아를 동반한 우리 가족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아이들이 유모차를 박차고 자신만의 의지와 근육으로 걷기 시작하면서 중문과의 사이는 자연스레 멀어졌다. 아이들은 인형이나 자동차를 구경할 수 있는 박물관보다 자연과 직접 만날 수 있는 바다와 산을 더 좋아했다. 비로소 여행이 아이의 '돌봄'을 거쳐 다 함께 즐기는 본래의 목적에 한 걸음 다가선 것이다. 그래도 가끔 아이들이 무척 좋아했던 <믿거나 말거나 박물관>, <초콜릿랜드>, <테디베어 뮤지엄>에 들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 반응이 어찌나 시큰둥한지 보는 내가 다 민망했다. 중문을 향하는 발길이 점점 뜸해지는 건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당연하게 느껴졌다.
제주 한달살이 중에 정말 오랜만에 중문을 다시 찾았다. 몇 번의 우연이 겹친 덕분이었다. 이틀 후면 제주를 떠나야 한다는 변치 않는 사실이 우리를 우울함의 늪에 밀어버린 때였다. 내일 자대로 복귀하는 첫 휴가를 나온 이등병의 심정도 이렇게 씁쓸하지는 않으리라! 설상가상으로 같은 편인 줄 알았던 날씨도 웬일인지 도와주지 않아 우울함과 아쉬움이 극에 달했다. 그 순간 현명한 아내가 가만히 앉아 있느니 '일단 어디든 나가고 보자'라고 의견을 제시했다. 제주 날씨를 마을 단위로 쪼개 검색한 후 약 한 시간 후면 금능 해변 날씨가 쾌청해질 것이라는 예보를 발견한 후였다. 변화무쌍한 제주 날씨도, 기상청 예보도 어쩐지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가장의 명령이니 우리 모두 쪼르륵 아내 뒤를 따랐다. 어차피 집에서 뒹굴거리기만 할 뿐, 딱히 할 일도 없었으니 밑져야 본전이었다.
위미리 집에서 금능으로 가는 길은 주로 제1우회도로(1132 지방도)를 이용했다. 억수 같이 내리던 비가 좀 잠잠해지긴 했지만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과연 이 날씨가 좋아지기는 할까 불신의 마음으로 아내 눈치를 보며 제1우회도로를 타고 가는데 거짓말처럼 중문 일대에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비췄다. 아내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노라며 중문 관광단지 쪽으로 방향을 돌리자고 했다. 운전대를 잡은 나는 기왕 금능에 가기로 했으니 그곳으로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살짝 의견을 피력했다. 아내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계획이 있으니 중문으로 향하라고 낮고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들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금능에 들르고 싶은 눈치였지만, 더 이상 고집 피울 수 없었다. 아내 말에 순응하는 건 삶의 진리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계획에 없던 중문 관광단지를 오랜만에 다시 찾았다. 아내는 호기롭게 별다방 캐러멜 마끼아또와 바나나 프라푸치노를 한 잔씩 돌렸다. 얼마 만에 누려보는 호사인지 몰랐다. 별다방에 앉아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는데 근사한 호텔 건물 뒤로 수줍은 태양이 얼굴을 드러 냈고 우리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서둘러 별다방을 나왔다. 그리고 무작정 햇살이 닿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무지개 끝에 숨겨놓은 요정의 보물을 찾는 사냥꾼처럼 집요하게 태양을 추격했다. 그렇게 우리 발길이 닿은 곳이 중문색달 해수욕장이었다.
중문색달 해수욕장은 아름다운 해안 풍경과 야자수의 이국적인 모습으로 중문 관광단지에서 시작해 천제연폭포와 대포주상절리와 이어지는 곳에 위치해 있다. 본래는 '긴 모래 해변'이라는 뜻의 '진모살'이라고 불렸다. 이곳 모래는 흑색, 회색, 적색, 백색이 섞여 있어 해가 비추는 방향에 따라 그 색깔이 달라 보인다고 한다. 특히 다른 해수욕장보다 파도가 높고 잦은 편이라 서핑을 즐기는 이들에게 인기가 많고,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국제 서핑대회도 이곳에서 개최된다. 중문색달 해수욕장을 찾은 날은 여름이 지나간 9월 초였는데도 여전히 많은 서퍼들이 파도를 즐겼다. 아내는 제대로 서핑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며 매우 아쉬워했다. 제주 곳곳에서 이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지만 중문색달 해수욕장 일대 풍광을 첫째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중문색달 해수욕장 물이 생각보다 너무 깨끗해 놀라기도 했다. 워낙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단지 내에 있어 바닷물이 오염되어 있지 않을까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다소 오래전 일이기는 하지만 1999년 환경운동연합이 실시한 수질 환경성 조사 결과 (당시) 전국 44개 해수욕장 가운데 최고의 청정 해수욕장으로 꼽힌 이력이 있을 만큼 깨끗함을 자랑했다. 물론 지금도 바닷물은 맑고 투명했다.
무엇보다 중문색달 해변이 좋았던 이유는 오랜만에 얼굴을 내민 태양과 구름이 만들어낸 천국 같은 하늘 때문이었다. 너무 맑은 하늘 때문에 유난히 바닷물도 맑고 투명하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양떼구름, 솜털 구름이 수놓은 하늘은 인간이 만든 언어로는 그 아름다움을 다 담아낼 수 없었다. 물놀이를 하지 않으면서 오랜 시간 바닷가에 머무를 수 있었던 것도 하늘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한 그때 아내의 혼잣말이 귓가에 스며들었다. 자신의 과감한 결단력과 리더십이 아니었다면 이토록 아름다운 하늘과 만날 수 있었느냐며….
옛 말 틀린 게 하나 없다. '아내 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속담 말이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깨달음을 얻고 가장이라는 막중한 자리를 아내에게 내주었다. 신혼 초 파워게임에서 백기 투항을 했다. 그 결과 가정에는 평화가, 부부 사이에는 사랑이 가득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라는 말의 의미가 가슴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아직 더 부딪혀야 한다. 누군가의 귀띔으로 깨달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내려놓으므로 모든 것을 얻는다는 삶의 단순한 진리를 깨달았다면 당신은 행복할 자격이 있다. 고로 나는 무척 행복하다. 일상의 소중한 행복을 일깨워준 중문색달 해수욕장에 다시 가고 싶다. 유효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 서둘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