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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Aug 17. 2020

아내는 아름다운 독재자

미처가 (美妻歌) 제5장 :  '자화상' (윤동주)

 우리 집 아이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이 있다. (외모가) 아빠를 닮았다는 말이다. 지금도 가끔 네가 아빠를 더 닮았네, 아니네 형이 더 닮았네 하며 싸우기까지 한다. 그걸 보는 아빠의 심정은 헤아리지도 못한 채 말이다. 분명한 것은 아이들은 상당 부분 내 외모 DNA 역시 가지고 있으며, 싫든 좋든 자라면서 아빠를 닮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데카르트가 모든 것을 부정해도 마지막까지 부정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확신했던 것처럼, 아이들이 아빠를 닮는 것 역시 최후까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아이들이 정말 말을 안 듣거나 말썽을 피우면 조용히 불러 귓속말을 해주곤 한다. 


 "너 사실 아빠 닮았어."


 외모는 아내의 가장 큰 강점 중에 하나다. 아내도 부정하지 않는다. 나 역시 그동안 몇 차례나 브런치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내의 외모에 첫눈에 반해 결혼을 결심했다. 외모가 그 사람을 헤아리는데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현대 사회에서 (성별에 상관없이) 외모 역시 경쟁력의 하나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아이들에게 외모에 관심을 가지는 만큼 정신과 마음을 아름답게 만드는데도 게을리하지 말라고예를 들어 독서나 운동, 당부하지만 그 말이 잔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어찌 모르겠는가. 어쨌든 티 없이 맑고 순수한 아이들이 기왕이면 아빠보다는 엄마를 더 닮고 싶어 하는 마음을 짐작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엄마를 닮고 싶어 하는 이유가 단지 외모 때문만은 아니다. 아이들은 힘(권력)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어디에 집중되어 있는가를 귀신처럼 알고 있다. 누가 가르쳐준 사람도 없는데 말이다. 우리 인간이 참으로 '정치적 인간 (homo politicus)'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다. 아이들은 힘(권력)을 동경하고 그 대상을 닮고 싶어 한다. 그 힘이 절대적이고 강할수록 더욱. 


 지난 글에서 가장으로서 아내를 노래했다면, 이번에는 견제받지 않는 절대 권력자로서 아내에 대해 말해 보고자 한다. 이는 권력에 대한 견제의 도구로써 언론의 사명과도 같으며,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에서 강조한 '반론의 자유'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 


 "어떤 의견이 어떠한 반론에도 논박당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옳다고 상정되는 경우와, 애초에 비판을 허용하지 않을 목적으로 미리 옳다고 상정되는 경우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다. 자신의 의견에 반박하고 반증할 자유를 완전히 인정해 주는 것이야 말로 자신의 의견이 자신의 행동 지침으로서 옳다고 내세울 수 있는 절대적인 조건이다. 전지전능하지 못한 인간은 이것 외의 방법으로는 자신이 옳다고 내세울 수 있는 합리적인 보증을 얻을 수 없다." 


 아내의 사전 검열을 받아 이 글이 브런치에서 "발행"된다면, 이는 이 글의 원래 목적에 충실하지 못한 채 독자에게 공개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한편으로 만약 아내의 사전 검열 없이 "발행"이 진행된다면, 나는 아마 처갓집으로 정치적 망명(또는 귀향, 유배)을 떠났을지도 모르겠다.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순간이다. 


 우리 집 식탁에서는 잔반이 허락되지 않는다. 아내(엄마)가 정성을 다해 만든 음식을 남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고, 또 아이들의 편식 습관을 고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했다. 쌀 한 톨은 말할 것도 없고, 국도 국물까지 남김없이 전부 비운다. 아이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빨리 식사를 끝내는 내가 언제나 모범을 보인다. 스스로 언제나 다이어트 중이라고 믿는 아내는 워낙 조금씩 (새 모이만큼) 담아주기도 하지만, 어쨌든 받은 밥과 국은 모두 비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런 원칙 덕분인지 우리 아이들은 보통 아이들이 잘 먹지 않는 음식, 예를 들어 콩을 포함한 잡곡류, 각종 나물이나 김치 등을 맛깔스럽게 잘 먹는다.  


 물론 배가 불러서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경우에 남기는 것도 허락된다. 하지만 이 경우 배가 불러 더는 음식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이기에, 후식도 허락되지 않는다. 나는 식사 후 후식을 먹는 것에 익숙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지만, 아이들은 서울 사람인 엄마를 닮아 'Dessert Culture'의 충실한 수호자로서 반드시 후식을 먹어야 하는 편에 속한다. 게다가 후식은 주로 달달하고, 달콤한 케이크나 빵 같은 종류이니 아이들이 후식을 마다할 이유도 없다. 따라서 눈치 빠른 아이들은 마음에 드는 후식이 준비되어 있는 경우 밥과 국의 양을 조절하는 기민함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음식 솜씨가 경지에 오른 아내(엄마)의 요리를 맛있게 먹다 보면 아이들은 종종 후식 들어갈 자리를 남기는 것을 잊어버리고 만다. 그럴 때면 여지없이 잔반이 나온다. 그럼 "No Clean, No Dessert" 원칙에 따라 후식은 냉장고 안으로 조용히 자취를 감추게 될 운명에 처한다. 아이들이 애처로운 눈을 해도 소용없다. 나는 단호히 "No"를 외친다.  


 이때 "Dessert Culture"의 제1 계승자로서 아내가 담담하게 선언을 한다. (아내도 이미 밥과 반찬을 남겼다.) 


 "오늘 사온 후식은 오늘 먹어야 제 맛이므로, 특별히 오늘만 원칙을 깨고 후식을 허락한다." 


 그러자 아이들은 '엄마 최고'라며 연호하며 침울했던 식탁이 갑자기 축제의 장으로 변한다. 이런 예외가 자주 발생하면 집안 운영 원칙들의 영(令)이 서지 않으므로 재고할 것을 강력히 요청하지만, 이미 아내의 시선 역시 후식에 닿아 있으므로 들리지 않는 듯하다. 그리고 절대 권력자로서 아내는 한 마디를 덧붙인다. 


 "이 집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오직 나만이 원칙에 예외를 둘 수 있다."


  나는 참지 못하고 강하게 항의한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언젠가 썩고 맙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서소."


 나를 제외하고 모두가 행복한 저녁 식탁이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얼른 양치질을 하러 욕실로 향한다. 그런데 유독 화장실이 더럽다. 사용한 화장지나 화장솜이 여기저기 어지러이 널려 있다. 칫솔을 물고 떨어진 화장솜 하나를 들고 나와 말한다.


 "이런 거 사용하면 바로 휴지통에 넣어야지. 누가 쓰고 그냥 그 자리에 고스란히 올려뒀어? 누구야?" 


 그러자 아내가 대답한다. 


 "이 집에서 화장실을 청소하는 오직 나만이 원칙에 예외를 둘 수 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화장실 선반에 놓인 휴지 조각들을 쓰레기통에 갖다 버린다. 여전히 아내와 아이들은 웃고 즐기며 마지막 남은 후식까지 전부 해치워 버린다. 무언가 나만 동떨어진 느낌, 모두 함께 있는데 나만 혼자라고 느끼는 순간이다. 거울이 비친 나는 칫솔을 입에 물고 나지막이 외친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오래가지 않는다." 


 공허한 메아리만이 울려 퍼진다. 이번 미처가(美妻歌)는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 원문으로 갈음해 보고자 한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저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저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자화상’ (1939.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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