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 읽는 그림책 : 테푸 할아버지의 요술 테이프
사회가 갈수록 각박(刻薄)해진다라는 촌스러운 말 조차도 세기말에 사라지고, 우리는 모든 것이 낯선 신세기에 산다. 인류의 조상들이 수십 세기에 걸쳐 적응한 변화를 현재의 우리는 불과 몇 년 만에 그다지 큰 노력도 없이 빠르게 적응했다. 겉으로만 적응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없던 첨단 기계, 생활 용품, 언어(신조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그렇다, 복잡한 세상을 인류는 꽤 잘 헤쳐나가고 있다.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였다. 그것을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언어이다. 인간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 '우리'다. 우리 집, 우리 학교, 우리 회사, 우리 동네, 우리나라 등 예는 수없이 많다. '우리'라는 상황이 맞지 않을 때 조차도 '우리'라는 표현을 쓴다. 인간의 DNA에 '우리'라는 세포가 깊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도록, 외로움에 견딘 수 없도록 인간은 설계되었다.
그렇다면 미래의 인간은 어떨까? 유발 하라리의 생각처럼 '신적인 인간'으로 진화할까?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과 갈수록 가속도가 더해지는 상황을 고려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듯하다. 하지만 앞에 수식어 하나가 더 붙게 될지도 모르겠다. '고독한 신적 인간'
갈수록 '공감능력'이 결여되는 현실이 우려되어 에둘러 말했다. 점점 '우리'에서 '나'가 되고 있는 상황이 좀 걱정이다. 연일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끔찍한 범죄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이미 지나치게 '나'이다.
오랜만에 지하철을 탔더니 예전부터 있던 '노약자석'과는 별개로 '임산부'를 위한 핑크 좌석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어 좀 놀랐다.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끔 그 핑크 좌석에 남성분이 앉아 있는 걸 목격할 때가 있다. 그 상황이 다소 민망스러웠다. 굳이 왜 저 자리에 앉을까? 궁금했다. 보통 내 또래이거나 젊어 보이는 남성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법으로 강제한 사항은 아니므로 일방적인 준수를 강요할 수는 없다. 그저 '임산부'에 공감하지 못(안)하는 마음이 안타까웠다. (안내문을 못 봤을까? 그러기엔 너무 크고 분명한데......) 임산부가 타면 바로 자리를 양보해 주리라 마음먹고 잠시 앉아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마음이었다면 처음부터 비워두는 건 어떨까? 버스나 지하철에 앉아있다 노인분들이 승차하면 얼른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는 편이다. (가끔 자느라 못 볼 때도 있지만, 자는 척은 하지 않는다.) 요즘은 자리를 양보받는 노인분들이 더 놀란다. 꼭 '요즘 누가 자리를 양보하나?'라는 표정이다. 양보는 공감의 다른 이름이다. 타인의 처지를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행동으로 발현될 수 없다.
일상에서 공감의 결여가 결국 크고 작은 범죄, 익명성 뒤에 숨은 악플, 다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의 시발점이 되곤 한다. 사전에 "공감(共感)"이란 단어의 뜻을 찾아보았다.
「명사」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
영어로는 "Sympathy". sym은 '~와 같은, 동일시'를, path는 '감정 (아픈 감정)'을 의미한다. 물론 path는 '길'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우리말과 마찬가지로 타인의 감정과 같은 상태가 되다, 타인의 감정과 동일시하다는 의미이다. 타인의 감정에 이르다도 결국 같은 의미다.
결국 공감이란 타인의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함께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경청(傾聽)'이다.
공감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은 '그랬구나. 잘 알겠어'이다. 무한도전 <무한상사> 편에서 박 차장(박명수)과 정 과장(정준하)이 상황극을 만들어 '빅 재미, 큰 웃음'을 주기도 했다. 짤로도 엄청 유명하니 공감에 대해 재미있게 느껴보고 싶다면 한번 찾아봐도 좋겠다.
공감에 관한 그림책은 수없이 많을 테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책이 <테푸 할아버지의 요술 테이프>였다. 아이들에게 이 책은 신기한 요술 같은 이야기다. 이야기 자체도 무척 재미있다. 테푸 할아버지의 테이프만 있으면 세상에 못 고치는 것이 없다. 아이들에게만 통하는 마법이다. 지독한 냄새가 나는 방귀를 자주 뀌는 민기의 배에 테이프를 턱 하니 붙이면 방귀에서 딸기향이 나고, 엄마한테 매일 혼나는 현서의 가슴에 테이프를 붙이면 속상했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친구에게 놀림을 받아 속상한 아이, 엄마 아빠가 바빠 심심한 아이, 김치를 먹어 입이 매운 아이, 모두 테푸 할아버지의 요술 테이프를 붙이면 기분이 좋아지고 편안해진다.
마법의 힘을 가진 테이프의 비법이 바로 공감이다. 테이프 자체는 '플라세보(Placebo) 현상'이다. 테푸 할아버지는 아이들의 말을 들어주고 진심으로 공감해 준다. "이리 와야 아가야. 많이 속상했겠구나." 이 말을 듣는 순간 아이는, 느끼지 못할 뿐, 이미 치유된다. 테이프를 붙이는 행위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치유를 시각화, 감각화 해 줄 뿐이다. 그렇게 테푸 할아버지의 말에 아이들은 자신감을 얻고,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 작은 상처만 나도 구급약통을 뒤져 반창고를 가져와 상처 부위에 붙여 달라는 아이들의 마음은 '치료'보다는 '공감'과 '위로'에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해 준다.
<테푸 할아버지의 요술 테이프>는 준이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무렵인 2014년에 우리 집에 왔다. 개성 강한 두 아이 준과 큐가 슬슬 '전쟁'을 시동걸 때였다. 이 무렵은 칭찬과 꾸중(또는 혼냄, 또는 야단)에 골든 크로스 (Golden Cross)가 발생한 시기였다. 부모로서의 공감능력이 정점을 찍고 내리막을 걸었다. 아내가 이 책을 구입한 이유도 아이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아내 자신을 위해서였다. 이 책을 읽은 아내는 의도적으로라도 "그랬구나. 엄마가 몰랐네."를 주문처럼 반복했다. 때론 효과가 좋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았다.
"테푸 할아버지가 자기 아이를 키웠다면 매일 이렇게 친절하게 말은 못 할 걸."
이런 말이 나온 날은 공감능력이 바닥을 뚫고 지하로 끝없이 추락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설명하지 않아도 무슨 의미인지 짐작할 것이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예측 불가능한, 의도한 대로 전혀 되지 않는 신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누가 이런 말도 했던 게 아닐까?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다. 공감능력이 풍부한 부모를 보고 자란 아이는 공감능력이 풍부할 수밖에 없다. 공감은 21세기의 중요한 키워드이다. 글로벌 회사에서 인재를 고를 때 중요하게 보는 덕목이기도 하다. 직원이 회사의 미래라고 강조하는 회사일수록 공감의 가치는 더욱 크다. 준이 중학교에 간 지금 <테푸 할아버지의 요술 테이프>를 아이들에게 읽어주지는 않는다. 그 대신 가끔 아내와 내가 읽는다. 보건교사 안은영이 영적 능력을 충전하기 위해 탑돌이를 하는 것처럼, 공감 능력을 충전하기 위해 우리는 <테푸 할아버지의 요술 테이프>를 읽는 셈이다. 그렇게 가끔 충전해 주지 않으면 쉽게 바닥을 드러내 버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