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재구성과 공동체, 어촌마을의 사계절을 담다

세 번 읽는 그림책 : '할머니, 어디 가요?' 시리즈

by 조이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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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어디 가요?' 시리즈는 둘째 Q가 무척 좋아하는 그림책이다. 지금도 아빠가 책 읽어줄게 좋아하는 그림책 골라와 하면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첫 번째로 들고 오는 그림책이다. 자연(특히 바다)을 좋아하는 Q가 빠질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그림책이다. 사실 Q가 아직 아기였을 때 이 책을 골라오면 딱히 반갑지만은 않았다. 당시 읽던 그림 위주의 책과는 다르게 글밥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한 권이 세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어 더 길게 느껴졌다. 얼추 다른 그림책 대여섯 권에 해당했다. 너무 피곤한 날에는 '이 책 읽으면 오늘은 한 권만 읽어 줄 거야.'라고 은근한 협박과 회유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Q는 단호했다. '알았어. 이 책만 읽어 줘.' (라고 해 놓고는 정작 다 읽으면 '딱 한 권만 더'를 세 번쯤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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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어디 가요?'는 미덕이 많은 그림책이다. 너른 들판과 울창한 산,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품었던 그들의 일부를 기꺼이 인간에게 내어주는 자연의 후의(厚意)에 흠뻑 빠지게 된다. 봄이면 어디에서든지 쑥쑥 잘 자라는 쑥이나 뒷산 중턱에는 올라가야 채취할 수 있는 엄나무 순, 한여름 우리 모두의 유일한(?) 군것질거리였던 앵두와 오디는 어느 것 하나 인간이 심고 가꾼 것이 아니었다. 자연이 스스로 길러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와 옥이, 마을 사람들은 결코 욕심부리지 않는다. 원래부터 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먹을 만큼만 구하고, 시장에 내다 팔아서 옥이 학교 들어갈 때 새 옷과 가방을 사줄 수 있을 만큼만 내다 판다. 참, 할머니 패션의 완성, 여행 갈 때 입을 몸빼를 장만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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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공동체의 넉넉한 인심도 느낄 수 있다. 이야기 설정이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옥이는 어촌 마을에서 할머니와 단 둘이 산다. 이촌향도(離村向都)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읍내에서 미용실을 운영한다) 할머니가 옥이의 보호자이긴 하지만, 온 마을이 함께 옥이를 보듬어 준다. 서로서로 보살펴주고 보살핌을 받는다. 대학에 다니는 이웃집 재동이 형은 방학 때 내려와 아직 한글을 배우지 못한 옥이(와 친구들)에게 글자를 가르쳐 주고, 할머니는 재동이 형이 좋아하는 굴 요리를 한상 차려준다. 그런가 하면 옥이 할머니는 치매를 앓는 이웃집 (훨씬 나이 많은) 할머니 기저귀를 갈아준다. 옥이 할머니가 벌에 쏘여 앓아누웠을 때는 동네 어른들이 복숭아며 사과, 감자와 옥수수를 들고 병문안을 온다. 마을 주민들끼리 천렵(川獵)도 함께 하고 바닷가로 피서(避暑)도 함께 간다. 젊은 사람 하나 없고, 아이들과 노인들로만 구성된 공동체이지만 생기가 넘쳐난다. 갯벌에서 망둥어라도 잡는 날은 동네 잔칫날이다. 막걸리 파티가 벌어진다.


요즘 이런 광경은 심지어 시골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옛 추억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지역 시민단체나 작은 도서관을 중심으로 '지역 공동체 역할'에 대해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국가나 사회의 안전망이 완벽하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공백을 지역 공동체가 채워보자는 취지다. 반가운 일이다. 결국에는 사람이 먼저니까.

할머니어디가요_시장풍경.jpg <시장 풍경에서는 반드시 옥이와 할머니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야 한다.>

Q가 이 책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짐작하건대 그림 때문인 듯하다. 저자인 조혜란 작가님이 '그림이 많이 나오는 그림책'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자신을 '그림 작가'로 이끌었다고 밝힌 것처럼, '할머니, 어디 가요?' 시리즈에는 그림이 정말 많다. 다소 투박해 보이지만, 자연과 사람이 어울려 사는 시골 풍경에 자꾸만 시선이 닿는다. 옥이 할머니는 정말 시골에서 만날 수 있는 할머니처럼 그려졌고, 옥이는 우리 집에도 한 명 있는 개구쟁이 모습 그대로다. 별다른 에피소드는 없지만 지게 소년에게도 정이 간다. 곱고 예쁘고 잘생긴 인물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감 가는 캐릭터다. 그리고 그 캐릭터를 형성하는 데는 그림의 역할이 매우 크다. 무엇보다도 바닷가 시골 마을의 사계절과 그 특징을 그림에 잘 담아냈다. 어머니가 끓여준 된장찌개 느낌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지도 맛있어 보이지도 않지만, 한 숟가락 떠먹어보면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맛! 누군가 내게 '할머니, 어디 가요?' 그림책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참으로 맛깔스럽다'라고 대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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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어디 가요?' 시리즈는 모두 네 권이다. 사계절을 담아서 네 권이다. 봄 편, 여름 편, 겨울 편은 일찍이 사두었는데 가을 편은 최근에야 겨우 구했다. 네 권이 나란히 꽂힌 책장을 보니 마음이 왠지 뿌듯했다. 아마 가을 편을 구하지 못했다면 '세 번 읽는 그림책'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영광(?)을 누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네 권의 책을 에피소드별로 제목만 소개해 본다.


<할머니, 어디 가요? 쑥 뜯으러 간다!>

- 쫀득쫀득 쑥개떡이 다 팔렸어!

- 쌉쌀한 엄나무 순 쌈 싸 먹고 무쳐 먹고

- 고불고불 고사리 고것 참 고소하다!


<할머니, 어디 가요? 앵두 따러 간다!>

- 탱글탱글 앵두 볼록볼록 오디 따러 간다!

- 배 아픈 데는 고소한 비름나물이 약이지!

- 바닷물 쭉 빠지면 뵤족뵤족 넘문쟁이 밭이여!


<할머니, 어디 가요? 밤 주우러 간다!>

- 짤깍짤깍 빨간 집게발 황바리 잡으러 가자

- 토실토실 달고 고소한 밤 주우러 가자

- 뽀실뽀실 미끄덩미끄덩 망둥어 낚으러 가자


<할머니, 어디 가요? 굴 캐러 간다!>

- 달각달각 쫄깃한 조개 한 보따리 캐러 가자

- 톡톡 콕콕 싱싱한 굴 한 소쿠리 캐러 가자

- 달달 쌉쌀 파릇한 감태 한 망태 매러 가자


개인적으로 <할머니, 어디 가요?> 시리즈를 좋아하는 건 향수(鄕愁)때문이다. Q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다 보면 나도 어느새 비슷한 또래의 개구쟁이로 돌아간다. 무릎이며 팔 뒤꿈치며 얼굴이 상처로 성할 날이 없었던 그 시절로 이끌어 주는 힘이 이 책에 있다. 어린 시절 할머니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동네 여기저기서 쑥을 캐다 쑥떡을 해 먹던 기억이 새삼 떠오르는가 하면, 초등(국민) 학교 때 앵두 따러 친구들과 동네 뒷산을 홀랑 뒤집어 놓았던 일, 보상금(천 원)이 걸린 이웃집 개를 찾아주기 위해 동네를 수십 바퀴나 헤맸던 일이 아스라이 눈앞에 펼쳐졌다. 옆 동네에서 호두 서리하다 주인집 아주머니 (하필 선생님이었다)한테 걸려 한 시간 동안 손들고 벌서며 훈계 들어야 했던 잊고 싶던 기억도 이 그림책 덕분에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소환되었다. "라테는 말이야..."가 절로 나온다. <할머니, 어디 가요?> 영향 때문인지 가끔 Q가 아빠 어릴 적에 텔레비전은 있었는지, 자동차는 있었는지, 심지어 과자는 있었는지와 같은 질문을 한다. Q는 아빠를 옛날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재주가 있다. "아빠 학교 다닐 때 운동 좀 했잖아."라고 말하면 Q는 그 운동을 <동학농민운동>으로 이해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아내와 나누며 한바탕 웃기도 했다. 그림책을 많이 읽는 Q의 상상력은 평범한 사람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된다.


한 가지 더 있다. <할머니, 어디 가요?>는 제철 음식(재료)에 대한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맞아, 봄에는 뭐니 뭐니 해도 달래와 쑥이 들어간 된장찌개가 최고지, 여름철 입맛 없을 때 고소한 비름나물 하나에도 밥 한 공기 뚝딱이지 하는 식으로 입맛 다시는 제철 음식을 상기시켜 준다. 바닷가 출신이 아니라 그쪽으로는 공감대가 부족하지만, 아마도 육지 못지않게 바다에도 어마어마하게 많은 제철 음식(재료)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이제 가을도 막바지로 치닫고 있으니 곧 찬 바람이 불면 싱싱한 굴로 지진 고소하고 담백한 굴전에 아내의 마법 소스를 찍어 막걸리 한 사발 어떨까? 벌써부터 군침이 꿀꺽하고 넘어간다.


'옛 것은 소중한 것이여.'라는 광고 카피가 생각나는 깊은 사골 국물 같은 <할머니, 어디 가요?> 시리즈는 시골 (외) 할머니 댁에 대한 추억을 간직한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하는 그림책이다. 반드시! 추억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하냐고? 이 책을 읽고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 나가면 된다. 그것이 언젠가는 아름다운 추억이 될 테니까. 오늘은 끊임없이 다시 써지는 어제가 꾼 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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