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스며드는 그림책

세 번 읽는 그림책 : 안녕, 나의 등대

by 조이홍

아내와 나는 같은 과 선후배, 역사학도로 만났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투철한(?) 역사 인식을 가지고 두 사람 모두 학업에 매진(둘 다 장학생)했으나, 졸업 후 나는 외국계 기업의 세일즈맨과 마케터, 아내는 증권사 트레이더가 되었다. 전공을 살려 사회에 진출하는 사람이 열에 한 명 나올까 하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취업 재수생이 되지 않은 것만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했다.


졸업하고 일 년은 막 첫발을 내디딘 사회생활에 적응하느라 연락 한번 주고받지 못했다. 그러다 내가 운 좋게도 지방에서 서울로 전근을 오게 되었다. 당시 우리 회사 사무실은 강남역에 있었고, 아내가 근무하는 지점은 분당에 있었다. '약속 없으면 영화나 같이 볼래?' 예쁜 후배에게 영화를 빌미로 데이트 신청을 했다. 아내도 마다하지 않고 평일 저녁 기꺼이 강남까지 왔다. 그렇게 1년을 연인인 듯, 연인 아닌, 연인 같은 관계가 계속되었다. 대한민국이 월드컵 4강 신화를 창조해 온 나라가 붉게 물든 던 해 우리는 결혼했다.


꿈이 없던 내가 고등학교 시절 막연하게 되고 싶었던 직업은 소설가와 영화감독이었다. 막연하니 절실하지 않았나 보다. 찻잔 속 태풍처럼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아내는 미대에 진학해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다. 하지만 여러 사정이 있어 포기해야 했다. 그렇게 꿈을 포기하고 살았다고 우리 부부가 불행했나? 그건 아니다. 무척 행복했다. 우리는 사랑했고(지금도), 같은 취미를 공유했으며, 서로에게 서로를 맞춰갈 만큼 넉넉한 마음도 지녔다. 다행히 정치적 성향도 비슷했다(은근 중요하다). 준과 Q과 태어났고 건강하게 잘 자라 주었다.


40대 중반을 넘기면서 2nd Life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영원히 회사에 다닐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할까? 꿈의 시계가 멈춰버렸던 그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그래, 글을 쓰자" 마침 아내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으니 "아내는 그리고, 나는 쓰자"까지 생각이 연결되었다. 부부가 함께 그림책 작가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아내는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초심자이므로 그림 단련, 글 단련이 필요했다. 동네책방도 많이 다녔다. 좋은 그림책을 많이 사 모으기도 했다. 언젠가는 우리 두 사람이 그리고 쓴 그림책이 세상에 나오길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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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의 등대>는 우리 부부가 참 좋아하는 그림책이다. 울림이 있는 이야기와 한 폭의 수채화 같은 그림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우리 부부가 만들고 싶은 '삶에 스며드는 그림책'이다. 등대지기와 그의 가족 이야기를 등대의 역사와 함께 담담하게 풀어냈다. 하나둘씩 우리 곁에서 사라져 가는 오래된 것들에 관심을 갖고 기록하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졌다. 극적인 이야기 전개 없이도 책을 다 읽고 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어린 시절이, 바다가, 오래도록 보지 못한 친구나 가족이 보고 싶어 졌다. 삶에 스며드는 그림책이란 이런 걸까?

벼룩시장에서 오래된 등대 그림을 발견한 작가는 등대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자료를 모으고, 박물관과 도서관을 찾아가고, 여러 나라를 찾아 직접 등대에 오르기도 했다. 그렇게 발로 뛰어 체득한 등대에 대한 다양한 역사적 사실과 자료가 작가의 영감과 결합해 탄생한 것이 그림책 <안녕, 나의 등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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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의 깊이와 수채화 물감으로 색감을 더한 그림은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감탄사를 유발한다. '이렇게 정성을 들여야 그림책 한 권이 세상에 나올 수 있구나' 생각하면 정신이 아찔하기도 하다. 세밀한 등대 내부나 바람 부는 바다, 거센 파도에 휩싸인 바다, 오로라가 소용돌이치는 바다는 모두 그대로 하나의 작품이다. 별도로 그림만 감상하면서 독자가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 봐도 좋을 듯했다. 독자의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많은 여백이 많은 그림의 좋은 사례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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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매일 그림을 그린다. 나도 틈틈이 글을 쓴다. 아직 함께 만들 그림책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세우지 않았지만 그날이 멀지 않음을 느낀다. 시기도 중요하겠으나 무엇보다 좋은 그림책을 만들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다'라는 기준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아마도 그 기준 중 하나가 '삶에 스며드는 그림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 어려운 일이다. 이 자리를 빌려 스스로에게 다짐해 본다. 이 다짐을 통해 나를 더 채근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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