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의 소설) 너와 나의 연애소설
“진정한 사랑은 우리 생에 있어 딱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 이를 스무 살의 사랑이라 정의한다. 이때 스무 살이라는 표현이 물리적 나이를 의미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진정한 사랑을 아주 일찍 경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삶의 황혼길에서 맞닥뜨리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왜 스무 살이라는 나이에 빗대어 사랑을 정의하려는가? 인간의 삶에 있어 스무 살은 고독과 적막에 싸인 번데기의 옷을 벗고 한 마리 나비가 되어 창공을 향해 처음으로 날갯짓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순수하고 동시에 찬란한 이율배반의 순간, 아직 쓰이지 않은 위대한 시상.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생이 단 한 번이듯 진정한 사랑도 오직 한 번뿐이다. 진정한 사랑 이후 반복되는 사랑은 모두 첫사랑의 변주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까지 써 내려간 후 준규는 자판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따뜻했던 커피가 어느새 차갑게 식었다. 다시 한 잔 뽑아올까? 그는 바지 주머니를 더듬거렸다. 백 원짜리 동전 하나가 없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남은 커피를 홀짝 마셨다. 의도하지 않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준규는 가끔 생각이 정리되지 않을 때면 담배를 피우지 않는 자신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야외 자판기 옆에 마련된 흡연실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사람들에게서는 왠지 깊은 고뇌와 사색이 느껴졌다. 삶의 무거움이랄까 아니면 진중함이랄까? 그럴 때마다 그는 한없이 가벼워지는 자신이 싫었다. 담배를 배워보려고 몇 번이나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의 몸이 자꾸만 담배를 밀어냈다.
준규는 가방에서 낡은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꺼냈다. 중학교 2학년 때 부모님께 생일선물로 받은 것이니 곧 10년이 다 되어간다. 대학 입학 선물로 받은 CD 플레이어도 집에 있었지만, 함께 해온 시간 때문인지 아니면 성격 탓인지 아직은 카세트테이프로 음악 듣는 게 좋았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김광석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는 지금까지 쓴 문장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어디서 본듯한 문장에 현학적 수사만 늘어놓았다. 문장력이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연애 한 번 못 해본 자신이 문제였다. 흔하디 흔한 연애 경험 한번 없는 준규에게 사랑의 정의를 내리는 일은 눈감고 바늘귀에 실을 꿰는 일만큼 힘들었다. <사랑, 연애와 결혼의 함수관계>라는 교양수업 리포트만 아니었다면 이놈의 사랑 때문에 머리 아프게 고민할 일은 없을 터였다.
수백 권의 연애소설, 수십 편의 영화를 통해서만 사랑이라는 걸 경험한 준규는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귓가에서 천상의 하모니가 들린다는 첫 키스가, 숨 막히는 황홀한 첫 경험이, 죽음보다 고통스럽다는 이별의 아픔이, 무엇보다 가슴 시리게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마음이 그에게는 와 닿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물론 소설을 읽으며 가슴 시린 이야기에 눈물을 훔치기도 했고, 시련 끝에 완성한 사랑에 그의 일인 양 기뻐하기도 했다. 따뜻한 심장이 없는 양철 나무꾼은 아니라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는 실체적 존재로써 사랑에 대해 전혀 몰랐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해 반 학기를 다니는 지금까지 그에게 사랑은 없었다. 아니 그의 일생을 통틀어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했다. 그는 사랑이 스스로 오는 것인지, 아니면 찾아야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첫눈에 반한다는 건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나오는 판타지일 뿐이었다. 과 동기 중에 친한 여자 친구들이 있었고, 동아리에도 여자 선후배들이 많았지만,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고등학교 단짝 친구들로부터 소개팅 압박도 제법 받았지만, 그런 자리는 억지로 인연을 만드는 듯해 내키지 않았다. 누가 보면 지금의 그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주위만 빙빙 겉도는 복학생 모습 그대로였다. 준규는 이렇게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전역 후 철이 든 탓인지 지금은 연애보다 미래를 준비하리라 마음먹었다. 만나게 될 인연이라면 언젠가는 만나게 되리라 그 자신을 위로했다.
“저…. 선배님 <저널리즘 개론> 수업 들으시죠, 중간고사 범위 여기까지 맞나요?”
누군가 그의 등을 살며시 두드렸다. 뒤를 돌아보았다. 이어폰 한 짝이 툭 하고 귀에서 떨어져 나갔다. 신경 쓰지 않았다. 여학생 한 명이 두꺼운 전공 책을 들고 서 있었다. 봄 햇살이 창문을 통해 스며들어왔다. 더운 실내 공기 때문인지, 리포트로 골머리를 앓기 때문인지 열람실 안에서도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 순간 준규는 시간이 평소와 달리 아주 천천히 흐른다고 느꼈다. 착각이 아니었다. 시간의 흐름에 균열이 생기고 누군가 그것을 조정했다. 준규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이미지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순진한 호기심에 딱 한 번 접속해 본 성인 사이트 같았다. 클릭 한번 했을 뿐인데 몇 초 만에 무려 아흔아홉 개의 팝업창이 14인치 모니터를 가득 채웠던 순간처럼 심장은 빨라지고 눈길 닿을 곳을 찾지 못한 동공은 허공을 헤맸다.
이번 학기에 준규는 <저널리즘 개론>을 듣지 않았다. 입대하기 전 수강한 과목이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이토록 당당하게 질문을 던진 여학생에게 왠지 딱 잘라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느낄 민망함에 그가 더 무안해질 터였다. <저널리즘 개론>은 좋아하는 서병준 교수님 강의라 시험 범위뿐만 아니라 심지어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출제 경향까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 수업을 듣는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를 선배님이라고 부르며 전공 수업 시험 범위를 묻는 눈앞의 여학생을 빨리 기억에서 소환해야 했다. 정황상 과 후배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듣는 수업이 한 과목도 없다는 건 더욱 분명했다. 아무리 겉도는 복학생이라도 함께 전공 수업 듣는 후배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이렇게 크고 고운 눈망울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욱…. 누구일까? 기억을 더듬어 나갈수록 생각의 소실점은 자꾸만 뒷걸음쳤다. 뭐라고 대답해야 했다. 시간은 더 이상 그의 편이 아니었다.
“미안해요, <저널리즘 개론> 수업 안 들어요. 군대 가기 전에 들어서 시험 범위는 대강 아는데 함께 수업 듣는 친구한테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머! 죄송해요, 선배님! 제가 착각했나 봐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녀는 황급히 자리로 돌아가 펼쳐 놓았던 책과 복사물들 그리고 흰색 삐삐를 가방에 욱여넣고는 황급히 열람실을 떠났다. 준규는 얼빠진 사람처럼 우두커니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쪽 귀에 걸려 있던 이어폰에서 김광석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곡, ‘나른한 오후’였다. 권태로운 듯하면서도 낭랑하고, 비가(悲歌)와 잘 어울리면서도 삶을 노래하는 김광석 목소리와 가장 잘 어울리는 곡이었다. 그녀와의 짧은 만남 동안 누군가 카세트 플레이어를 멈추었다가 그녀가 떠나자 다시 플레이 버튼을 누른 듯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준규는 이 우연한 만남이 어쩌면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이 되리란 걸 예감했다. 심장이 그에게 귀띔해 주었다. 이토록 빠르고 불규칙하게 작동하기는 태어난 이래 처음이었음을. 그도 아직 그 여운을 느낄 수 있었다. 준규는 이제 아웃사이더 복학생 놀이는 그만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