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 캠퍼스 커플

(주말의 소설) 너와 나의 연애소설

by 조이홍

금요일 오후 마지막 강의를 듣고 온 준규는 열람실 책상 위에서 반듯하게 접힌 편지와 캔 커피 하나를 발견했다. 커피는 아직 따뜻했다. 무심한 척했으나 설레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도 살짝 가슴이 두근거렸다. 도서관이 공부만 하는 공간이 아님을 그 역시 잘 알았다. 숱한 사랑의 역사가 이루어진 장소가 바로 이곳 열람실이었다. 한참 인기를 끌고 있는 '사랑의 스튜디오'도 90도로 인사하며 형님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물론 애초 목적은 누구나 학업에 정진하기 위해 도서관을 찾았다. 그 순수함마저 부정할 수 없었다. 청춘남녀가 한 자리에서 들끓는 열정으로 학업에 정진하다 보면 얼마든지 마음에 드는 이성을 발견할 수 있을 터였다. 용기 내어 말하지 못하는 사랑의 약자들은 정성을 다해 꾹꾹 눌러쓴 손편지로 마음을 전했다. 젊음이 있기에 사랑이 넘쳐났다. 뻔한 80년대 방식이 90년대에도 통했다. 이번에는 그의 차례였던가? 편지를 두 손으로 꼭 쥔 준규는 낯선 상황에 긴장했는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크게 들렸는지 근처에서 책에 머리를 깊숙이 박고 공부하던 학생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날카로운 시선으로 일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도 재빨리 두리번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전역 후 두 달, 아직 군인 정신이 남아 있었던가? 그는 자신의 민첩한 대응에 만족했다. 떨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정성을 다해 편지를 펼쳤다.


‘선배님, 지난번 일은 죄송해요. 시험 과목이 많다 보니 마음이 급했나 봐요. 확인도 하지 않고 불쑥 질문부터 했네요. 과 행정실에서 몇 번 뵌 걸 착각했네요. 선배님 족보 덕분에 <저널리즘 개론> 시험 잘 봤어요. 그래도 그 실수 덕분에 이제 아는 사이가 됐잖아요. 다음에는 우리 서로 인사해요. 커피는 따뜻할 때 드세요. 95학번 정지민 드림.’


누군가의 고백 편지는 아니었지만, 준규는 더없이 기뻤다. 후배로부터 이토록 깜찍한 감사 편지를 받게 될 줄은 몰랐다. 꾹 다문 입술 사이로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와 어색하게 만났던 날 밤, 준규는 <저널리즘 개론> 노트를 찾아 중간고사 대비 족보를 급하게 만들었다. 사실 그의 강의 노트는 시험 기간이 되면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동기나 후배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선배들도 그가 한 필기를 참고했다. 연애는 빵점이었지만 학과 공부라면 누구보다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자신했다. 다음 날, 마침 그 수업을 듣는 한 학번 아래 후배가 있어 선심 쓰듯 족보를 풀었다. 다른 후배들과 함께 보라는 말도 빼놓지 않음은 물론이었다. 결국 그의 족보가 자연스럽게 지민에게까지 흘러갔다. 준규는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다. 딱히 그래야 할 이유는 없었다. 괜한 오지랖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그는 지민의 얼굴도 온전히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크고 예쁜 눈, 금방이라도 맑고 투명한 눈물이 뚝뚝 떨어질 듯한 눈망울만큼은 똑똑히 기억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그 눈 때문이었다. 아주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준규의 DNA는 지민의 눈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설계되었다. 누구도 입증할 수 없었지만, 이는 다윈의 진화론처럼 적확한 사실임이 틀림없었다. 준규는 아직 따뜻한 캔 커피를 두 손으로 꼭 감싸 쥐었다.

3화 그림.jpg

중간고사가 끝난 캠퍼스에는 활기가 넘쳤다. 신문방송학과 학생회도 농활 준비로 분주했다. 2학년 과 대표인 지민은 많은 학우가 참여할 수 있도록 농활 홍보 역할을 맡았다. 80년대 학번 선배들은 90년대 학번들이 편안함만을 쫓아 농활 참여율이 저조하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지민의 어깨가 무거웠다. 항상 그랬다. 열심히 하는 사람이 언제나 더 많은 일을 해야만 했다. 지민은 동기나 후배들은 어떻게 설득해 볼 수 있었지만, 선배들한테는 말 꺼내기가 왠지 부담스러웠다. 그때 지민의 머리에 떠오른 사람이 준규였다. 그는 왠지 그녀가 하지 못하는 일들을 도와주리라 막연하게 기대했다.


“내가 뭘 도와주면 되는데(요)?”

“선배님 학번부터 위로 쭉 설득해 주세요. 아래 학번은 제가 할게요.”

“나도 농활은 한 번도 안 가봐서…. 내가 설득해서 효과가 있을까(요)?”

“그러니까, 더 설득력이 있는 거죠. 우리 과 킹카도 동참하는 농촌봉사활동에 학우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대자보 제목도 나왔네요.”

“나 킹카 아닌데(요)?”

“선배님 이야기 아닌데요? 그리고 제가 후밴데 말 편하게 하세요. 아무튼 이번에 도와주시면 꼭 신세 갚을게요. 네? 부탁합니다. 선배님”

"그… 그래, 알았어(요)."


두 사람이 노력한 덕분인지 역대 최고 참여율을 기록하며 농활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지민과 준규는 밤마다 막걸리잔을 사이에 두고 많은 대화를 나눴다. 대화 주제의 스펙트럼도 영화나 대중가요부터 삶, 노동, 남북관계까지 그야말로 다양했다. 공통점만큼이나 차이점도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에게 스며들었다. 두 사람은 인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으나 농활이 맺어준 공식 커플이 되었다. 매일 밤 마주 앉아 서로의 눈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그토록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 누구라도 그들이 연인 사이라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왠지 당사자인 두 사람도 싫지 않은 눈치였다.


2학기가 되자 준구와 지민은 공식 캠퍼스 커플이 되었다. 의도하지 않아도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다섯 과목의 전공 수업을 함께 들었고, 그중 세 과목은 같은 조로 활동했다. 조별 과제를 준비하다 보면 늦게까지 함께 자료를 찾기도 하고 저녁이나 야식을 먹는 일도 잦았다. 준규도 부모님께 용돈 받아 생활하는 학생이었지만, 후배들과 함께하는 조별 모임에서 한 번쯤은 선배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먼저 계산대 앞으로 뛰어가 지갑을 열려고 하면 지민이 따라와 가로막았다.


“오빠도 똑같은 학생인데 무슨 돈이 있어요? 각자 오천 원씩 내 얼른!”

“괜찮아 지민아. 이 정도는….”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사고 싶으면 자판기 커피나 한잔씩 뽑아주세요.”


준규는 가끔 자신을 난처하게 만드는 지민도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자신을 위한 마음이라 생각했다. 사실 두 사람의 관계는 묘했다. 누가 먼저 사귀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부터 1일'이라는 요란한 서약도 없었음은 물론이었다. 서로에게 스며들었으나 각자의 빛깔은 유지했다. 사실 연인 사이에 이런 균형은 제법 중요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일방적인 관계란 다른 한쪽의 불가피한 희생을 초래했다. 사랑의 유통기한이 아직 한참 남아 있을 때에는 그런 희생은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다. 그때는 희생이라는 이름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예쁘게 포장되었으니,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일방적인 사랑이란 언제나 끝이 좋지 않음은 고금을 막론하고 불변의 이치였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을 사랑에 빠진 이들만 몰랐다. 아니, 모르는 척했다.


시간은 느리게 걷는 늙은 소를 재촉하는 농부의 억센 팔처럼 조금의 서투름도 없이 명징하게 흘렀다. 두 사람의 관계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지민에게 사랑이란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었다면, 준규에게는 서로를 마주 보는 것이었다. 물론 사랑에 관한 두 사람의 온도차를 서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준규의 시선은 언제나 지민을 향해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은 촉촉하게 젖은 지민의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아몬드 향을 사랑했다. 눈이 오는 날에는 심통 난 아이처럼 빨개진 볼로 학교 이곳저곳을 누비는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에는 연신 손부채를 부치는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을 꼭 잡아주었다. 이제 그녀 없는 그의 삶은 상상할 수 없었다. 지민과 함께 평생을 하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지민도 그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그녀도 준규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에는 아직 무수히 많은 물음표가 있었다. 커리어 여성으로서 사회적 성공, 아내로서 행복한 결혼 생활 어떤 것도 그녀 삶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다.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심지어 그녀조차 잘 몰랐다. 어느 길을 가든지 그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반드시 함께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진정한 인연이라면 <첨밀밀>의 소군과 이요처럼 언제, 어디에서도 다시 만나게 되리라 믿었다. 누군가 그녀가 비겁하다고 비난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삶의 방향을 결정하기에 그녀는 아직 어리고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매거진의 이전글제2화 : 어느 봄날의 첫 만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