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 세렌디피티

(주말의 소설) 너와 나의 연애소설

by 조이홍

“준규 선수, 좀 더 참신한 거 없어? 우리나라 최고 광고대행사 AE가 이것밖에 안 될 리가 없는데…. 우리 회사 광고 예산이 달랑 100억밖에 안 된다고 좋은 거는 매번 다른 회사에만 들고 가나 봐!”


클라이언트와의 미팅은 언제나 준규를 지치게 했다. 품위 있는 척 행동해도 결국 클라이언트란 족속은 다 같았다. 언제나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다. 말은 또 얼마나 베베 꼬는 지….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고, 아니 세계적으로도 상위권인 광고대행사 2년 차 AE지만, 클라이언트 앞에서는 2% 부족한 사회 초년생으로 보여야만 했다. 그래야 모두가 행복했다. 그를 제외하고 말이다.


“과장님, 그런 말씀하시면 섭섭합니다. 우리 회사에서 최고 인재들만 모여있는 미디어 전략팀에서 이번 달에 새로 나온 따끈따끈한 것들만 가져온 거예요. 과장님이 워낙 이 바닥 사정에 빠삭하시니까 식상하다고 느끼는 거죠, 아마 이거 들고 다른 회사 가면 빨리 부킹 하자고 난리 날 겁니다.”

“에이, 선수끼리 왜 그래. 숨겨둔 거 많잖아. 느낌적인 느낌 그런 거! A전자에 제안하는. 우리도 그런 매체 구경 좀 해보자.”

"이게 그거예요!"


클라이언트와 미팅이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자 준규는 엄청난 피로감을 느꼈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건물 밖으로 나온 그는 회사로 복귀하는 발걸음을 멈췄다. 클라이언트와 미팅하러 나올 때 사무실 책상 서랍에 자존심은 두고 가라는 선배들의 조언에 언제나 충실한 그였다. 마음의 상처는 받지 않았다. 하지만 밀려드는 공허감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럴 때는 소박한 일탈이 필요할 터였다. 준규는 사무실에 돌아가기 전에 돌+아이 홍 과장에게 달달 볶인 자신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마침 최근 급속도로 매장 수가 늘고 있는 별다방이 근처에서 신규 매장을 오픈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달달한 자판기 커피나 믹스 커피에 길들여진 그는 아직 쓴 커피 맛을 즐길 줄 몰랐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근사하게 차려진 공간에서 고급 커피 한 잔으로 위로받고 싶었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별다방으로 향했다.


오후 시간인데도 별다방에는 긴 줄이 끝없이 이어졌다. 준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커피를 좋아했었나 싶었다. 갑자기 AE 촉이 발동했다. 중요 체크 포인트였다. 쓴 커피를 마시려고 이토록 많은 사람이 기다리는 것을 보니 머지않아 건물마다 커피 전문점이 하나씩 생길지도 몰랐다. 신규 광고주 발굴을 위해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도 AE 역할 중 하나였다. 어? 지금 뭐 하는 거지. 일하러 온 게 아니잖아! 준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머리를 비우려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긴 줄 끝에서 한참을 기다려 마침내 준규가 주문할 차례였다. 어떤 음료를 선택해야 할지 난감한 그는 주문을 받는 미소가 예쁜 직원에게 추천을 부탁했다. 제시카라는 애칭의 그녀는 상냥한 미소와 함께 캐러멜 마키아토라는 제품을 주문해 주었다. 지친 오후에 어울리는 달달한 음료라는 게 그녀의 설명이었다. 초콜릿이나 사탕 같은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달콤한 커피 한 잔쯤은 괜찮을 것 같았다. 그의 번호가 불리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기에 구석에 앉아 멍 때리기나 할 참이었다. 그 순간, 한동안 잊고 지냈던 맑고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는 여성의 목소리는 분명 지민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채 꽤 가까운 거리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서 있었다. 둘 중 하나라도 기다림에 싫증을 느꼈더라면 떨어져 나갈 인연의 끈이 그렇게 억척같이 이어져 있었다.


커다랗고 고운 지민의 눈을 다시 본 순간 준규 머릿속으로 수많은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졸업하고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첫해는 하루도 지민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녀 생각에 잠들지 못하는 밤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지만 취업에 실패하고 취업 재수생이 되면서 그의 삶도 변했다. 1년을 꼬박 다시 준비하고 지금 일하는 광고대행사에 입사했지만, 그것도 끝이 아닌 또 하나의 시작점에 불과했다. 경쟁과 실적으로 내몰리는 팍팍한 삶을 사는 동안 지민을 향한 마음은 조금씩 잊혔고, 그 빈자리를 세속적인 낱말들로 채워갔다. 그녀를 그리워하는 날보다 그렇지 않은 날이 점점 늘어갔다. 그렇게 그는 사회인이 되었다. 클라이언트와의 미팅 전날에는 퇴근이란 없었고, 경쟁 PT라도 예정되면 몇 주간 야근을 밥 먹듯이 했다. 모처럼 일찍 퇴근하는 날에는 동기들과 모인 술자리에서 어떤 선배가 더 돌+아이인지, 어떤 클라이언트가 더 미친개인지 경쟁이라도 하듯 뒷담화를 해댔다. 그런 날은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술이 술을 마셨다. 그렇게 지민은 그의 가슴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다시 지민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떠났다고 생각한 감정들이 겨우내 꽁꽁 얼었던 땅을 꿰뚫고 나오는 이른 봄의 새싹처럼 힘차게 솟아났다.


“지, 지민아! 잘 지냈어?”

“어, 오빠! 어떻게…. 강남 한가운데서 만나네요. 잘 지냈어요?”

“그러게.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회사가 이 근처야?”

“아니요. 회사는 강북이에요. 외근 나왔다가 별다방 구경하고 커피나 한잔 하려고요. 오빠는요?”

“나도 사무실은 이태원이야. 클라이언트랑 미팅 있어서. 혼자 왔어? 일행 없으면 같이 커피 한잔할래?”

“네…. 그래요. 그런데 오래는 못 있을 것 같아요.”

4화 그림.jpg <일러스트 제공 - 사비연필>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어색함 속에서도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준규는 여전히 두 사람이 헤어져야만 했던 이유가 궁금했지만 끝내 묻지 않았다. 3년 만에 만난 옛사랑에게 그런 질문을 던질 만큼 우매하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혹시 두 사람의 만남이 오늘로 끝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꼭 질문하리라 결심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우연한 재회 덕분에 준규는 지난 3년 동안 지민이 어떻게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졸업 후 언론고시에 합격해 신문사 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역시 그녀다웠다. 하지만 이름 꽤나 날리던 신문사의 남성 중심적이고 보수적인 문화를 참지 못하고 6개월 만에 사직서를 냈다는 놀라운 이야기도 들었다. 현재는 작은 영화사에서 홍보와 마케팅을 담당한다고 했다. 헤어지기 전에 준규는 얼른 자신의 명함을 지민에게 건넸다. 잠깐 주저하던 지민도 명함 한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다음에 또 보자는 형식적인 인사를 남기고 지민은 먼저 일어났다. 그녀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준규는 두 사람이 머지않아 다시 만나게 되리라 예감했다.


준규는 벌써 30분이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시간이 훌쩍 지나감을 한탄했다. 두 사람이 함께 캠퍼스를 누비던 시절에는 소위 삐삐라고 불리는 무선호출기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불편하기 그지없지만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이었다. 남겨진 번호가 누구인지 모를 때에는 공중전화 다이얼을 누르는 손끝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제법 낭만적인 시절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삐삐보다 휴대폰을 더 사용했다. 머지않아 무선호출 서비스를 종료한다는 소문도 무성했다. 자신도 회사일 때문에 휴대폰을 쓰고 있지만 퇴근도, 주말도 없는 삶을 강요하는 족쇄 같은 휴대폰보다 차라리 삐삐 쓰던 시절이 그리웠다.


내일이면 벌써 지민을 만나고 두 번째 주말이 되는데 아직 연락은커녕 문자조차 보내지 못했다. 지난 주말에 연락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광고 예산과 미디어 믹스를 요청하는 돌+아이 때문에 주말도 반납하고 정신없이 일해야만 했다. 다행히 이번 주말은 모처럼 회사 일에 시달리지 않는 자유의 날이었다. 지민에게 연락하고 싶지만 한 주간의 공백이 그의 마음을 자꾸 잡아끌었다. 몇 번이나 그녀에게 문자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결국 용기를 내 전화를 걸기로 했다. 대입 합격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학교로 전화를 걸 때도 이렇게 떨리지는 않았는데 자꾸만 쿵쾅거리는 가슴을 쓸어안고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열 자리 번호를 누르자 뚜~ 하는 신호 연결음 대신에 익숙한 클래식 음악이 들려왔다. 잠깐 놀랐다. 새로 도입한 통신사 유료 서비스였다. 이름이 뭐였더라? 맞다, 뜬금없이 컬러링이라니…. 그래도 음악이 흘러나오자 떨리는 마음이 다소 진정되었나 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음악 소리에 맞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순간 수화기 너머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나야, 준규. 너무 늦은 시간에 연락한 것 아니지?”

“준규 오빠? 그럼요, 10시면 아직 초저녁이잖아요.”

"잘 지냈지?"

"네, 그럭저럭요."

“혹시 이번 주 토요일에 뭐해?"

"네?"

"약속 없으면 영화나 같이 볼까 해서. 허진호 감독 신작이 나왔어. <봄날은 간다>라고."

“약속은 없는데…."

"그럼 같이 보자. 내가 맛있는 저녁도 살게. 나한테 신세 갚을 것도 있잖아"

"네? 무슨 신세요?"

"학교 다닐 때 내가 농활 모집하는 거 도와줬잖아."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네요. 그래요. 마침 보고 싶던 영화였어요….”


두 사람은 인파가 많이 몰리는 토요일 저녁에 강남역 씨네시티 극장 앞에서 만났다. 준규가 두 시간이나 먼저와 영화표를 미리 사둔 덕분에 줄을 서지 않고 <봄날은 간다>를 보았다. 영화를 보고 강남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안동찜닭을 먹기로 했다. 두 사람 모두 밥을 먹기 위해 긴 행렬에 동참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왠지 마음에 여유가 있었다. 다행히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려 맛본 안동찜닭은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밥을 먹으면서 두 사람은 (봄날은 간다>보다 허진호 감독의 이전 작품인 <8월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더 많이 했다. 이야기를 하면서 두 사람 모두 <8월의 크리스마스>가 최고의 인생 영화라는 공통점도 발견했다. 사실 준규는 이 대목에서 많이 놀랐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민은 <델마와 루이스>나 <소년은 울지 않는다> 같은 색채 짙은 영화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에 관해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단 하루였지만 함께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둘은 예전의 편안한 선후배 관계가 되었다. 그렇다고 다시 연인 관계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둘의 관계는 안갯속을 걷는 것처럼 선명하지 않았다. 마치 문지방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았다.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않는 모호함 위에 놓였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가끔 만나서 영화를 보고 저녁을 먹었다. 비용은 언제나 반반씩 부담했다. 준규가 영화표를 사면 저녁값은 지민이 냈다. 두 사람 모두 사회 초년생이라 월급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굴지의 광고대행사를 다니는 준규가 작은 영화사를 다니는 지민보다 형편이 조금 나았을 터였다. 선배이기도 하고, 남자이기도 한 준규는 항상 모든 비용을 부담하려고 했지만, 지민은 학생 때처럼 자신의 몫은 스스로 감당하려고 했다. 준규는 몇 번인가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꺾지 않는 지민에게 두 손 들고 말았다. 남자는 어떠해야 하고, 여자는 어떠해야 한다는 따위의 고정관념에서 그녀는 자유로웠다. 그런 지민을 보고 있으면 예전의 감정이 자꾸 새어 나왔다. 하지만 준규는 자신의 감정을 지민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지금은 그저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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