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 세 번의 고백

(주말의 소설) 너와 나의 연애소설

by 조이홍

준규와 지민이 다시 만난 지도 어느새 6개월이 지났다. 계절은 초여름에서 겨울의 문턱을 훌쩍 뛰어넘었다. 여전히 두 사람은 경계가 모호한 관계의 숲을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은 보통의 남녀 관계와 사뭇 달랐다. 뒤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했다. 사실 지민에게도 둘의 관계는 물음표였다. 우정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진했고 사랑이라 부르기에는 다소 옅었다. 그녀는 애써 둘의 관계를 정의하고 싶지 않았다. 규정짓는 순간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할 것 같았다. 준규는 달랐다. 그는 우연히 지민을 다시 만난 순간 잃어버렸던 스무 살의 사랑이 부활한 것이라 믿었다. 완벽한 세렌디피티(Serendipity)였다. 영국 소설가 호레이스 월폴 (Horace Walpole)이 만든 이 말은 우연히 예기치 않게, 운수 좋게 새로운 것을 발견해내는 능력을 의미했다. 준규에게는 ‘숙명으로 이어진 운명’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녀와의 이별 후 그가 경험한 것은 무(無)였다. 끝없이 밀려오는 슬픔과 눈물 뒤에 오는 것은 없음이었다. 그녀의 부재가 그의 부재를 낳았다. 그날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별다방으로 그의 발길을 잡아끌었던 건 커피 한 잔의 위로가 아니라 지민이었음이 분명했다. 잘려나간 인연의 끈을 누군가가 다시 연결해 주지 않았다면 흩어져 살던 두 사람이 어떻게 서울 한가운데서 다시 만날 수 있었겠는가? 준규는 두 사람이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될 인연이었음을 확신했다. 조심스럽게 그의 마음을 고백하기로 했다. 마침 며칠 후면 크리스마스이브였다. 그날만큼 사랑을 고백하기에 좋은 날은 없을 터였다.


크리스마스이브의 강남역은 엄청난 인파로 발 디딜 곳조차 없었다. 그나마 눈이 내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눈까지 내렸다면 가장 신성한 분이 태어난 날 지옥을 경험했을지도 몰랐다. 몇 해 전부터 경기가 안 좋다느니 연말 분위기가 사라졌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무성했지만, 대한민국에서 이곳만큼은 여전히 생기 넘치는 사람들과 가게마다 자리를 꽉 채운 손님들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오늘따라 지민은 다른 날과는 무척 달라 보였다. 준규가 감당할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를 풍겼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커다란 눈망울은 유난히 더 눈에 띄었다. 너무 아름다워 왠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설 수 없을 듯했다. 그래서일까? 준규는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불안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날 무슨 영화를 봤는지 기억조차 못했다. 그의 고백이 불러일으킬 나비효과를 예측하느라 깊은 생각의 늪에 빠졌다. 준규는 아직 헤어진 이유도 몰랐다. 만약 지민이 그에게서 용납할 수 없는 어떤 단점을 발견한 거라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의 서툰 행동으로 다시 그녀와 멀어지게 되면? 두 번째 이별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더 많이 사랑한 그가 사랑의 약자였다. 불길한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지금처럼 그녀를 바라보는 게 그가 가질 수 있는 행복의 전부일까? 그는 스스로 자기 검열에 빠졌다. 그 순간 어두운 극장 안에서 환하게 빛나는 크고 고운 그녀의 눈에 눈길이 닿았다. 그 눈이 '용기를 내'라고 말하는 듯했다. 남자들은 어쩌면 이렇게 쉽게 착각에 빠지는 존재인지…. 사실 준규가 들었다고 착각한 그 소리는 지민의 눈이 아니라 준규 마음속에서 들려온 외침이었다. 그는 원래 계획대로 실천하기로 마음먹었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평소에는 영화 보고 저녁 식사를 하면 디저트를 먹거나 커피를 마시고 헤어졌지만, 대신 가벼운 술 한잔을 제안했다. 지민도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규는 미리 점찍어 둔 강남역 뒷골목 조용한 바(Bar)로 그녀를 안내했다. 바 이름이 세렌디피티였다는 점에서 준비는 꽤 치밀했다. 바는 다른 곳만큼 사람이 붐비지 않아 비교적 조용했다. 은은한 조명이 편안하게 느껴지는 꽤 근사한 장소였다. 준규는 테이블 앞에 놓인 연인을 위한 크리스마스 이벤트라고 큼지막하게 쓰인 홍보문구를 보고 시바스 리갈 (Chivas Regal) 18을 주문했다. 맥주나 가벼운 칵테일 정도를 예상했던 지민은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크리스마스이브니까 1년에 하루쯤은 괜찮을 듯싶었다. 태어날 때부터 친절함이 몸에 배어 있었을 법한 큰 키의 잘생긴 바텐더가 주문한 술과 안주를 가져다주었다. 얼음과 물, 토닉 워터, 그리고 견과류를 담은 예쁜 은색 접시까지 두 사람 앞에 놓이자 준규는 온더록스 두 개에 얼음을 담아 지민 앞에 놓아주었다. 지민이 술병을 살포시 들었다.


“이 술 유명한 거예요? 우리 아빠도 무척 좋아하던데. 마셔보는 건 처음이라 맛이 정말 궁금해요.”

“사실 나도 처음 마셔보는 거야. 압구정동 가면 젊은 사람들은 다 이 술 마신데. 크리스마스이브니까 기분 한번 내보려고. 괜찮지? 올 한 해도 아등바등 버텨낸 청춘을 위해 건배 한번 할까?”


초콜릿과 바닐라 향이 난다는 홍보문구는 거짓말이었다. 대신 입안을 감도는 진한 여운이 느껴졌다. 나쁘지 않았는지 두 사람은 몇 번이고 술잔을 비웠다. 술자리에서 학창 시절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는 좋은 안줏거리였다. 알고 보니 A와 B가 몰래 사귀었더라, 조별 활동에서 누구는 엄청 열심히 했는데 누구는 얌체처럼 무임승차만 했다든지, C 교수님 수업은 정말 졸려서 출석 부를 때만 제정신이었다든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둘의 대화는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는 사이 700mL 술병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화제가 영화로 바뀌고 자연스럽게 인생 영화인 <8월의 크리스마스>가 등장하자 두 사람은 마치 영화감독과 평론가라도 된 것처럼 열띤 토론을 벌였다. 준규는 고백할 순간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지민아, 너 혹시 생각해 봤어? 왜 정원이가 다림이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 않았는지? 자신이 떠날 운명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어서 홀로 남겨질 다림이에게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게 남겨진 사람을 위한 배려라고 믿었겠지. 하지만 내 생각엔 정원이 고백했더라도 다림이는 절대 그를 원망하지 않았을 거야. 사랑했으니까. 사랑한 기억만 가지고도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잖아. 우리 인간은.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 사실 너를 다시 본 순간부터 예전 우리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어. 우리가 어쩌면 꼭 만나야 할 인연이 아니었나 싶어. 마치 운명처럼. 정원이는 다림이를 떠났지만, 나는 네 곁에 오래도록 함께 있을게. 지민아, 널 다시 사랑해도 괜찮을까?”


위스키를 너무 많이 마신 탓일까? 지민은 준규의 고백이 마치 연극 무대에서 홀로 독백하는 배우의 연기 같다고 느꼈다. 비장하지만 왠지 서툴렀다. 하지만 그가 하는 말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귀에 쏙 들어왔다. 차라리 흠뻑 취해 못 들은 척해버리면 마음이라도 편했을 텐데. 대답을 미뤄왔던 질문이 예고도 없이 그녀 앞에 내던져졌다. 피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던진 질문에도 아직 답을 구하지 못했다. 마음 한 구석에 정답이 있을지 몰랐지만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식으로든 그의 질문에 답해야 했다. 평소의 차분하고 냉철한 그녀로 돌아와야 했다. 이 순간 그녀를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마음이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 그녀를 관통했고 이제 자신만이 이 상황을 끝낼 수 있었다.


“오빠랑 있으면 참 편해요. 생각이 달라도 이렇게 대화도 잘 통하고요. 둘이 만나는 이 시간이 제게도 너무 소중해요. 하지만 여기까지예요. 예전에 왜 헤어져야 하냐고 이유를 물었었죠? 바로 저 때문이에요…. 오빠가 아니라 제가 문제였죠. 가끔 우리 두 사람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오빠를 보면서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가족을 이루는 걸 상상해 보았어요. 하지만 그게 제가 바라는 미래의 모습인지 확신할 수 없었어요. 그때 깨달았어요. 저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사람이라고. 저랑 이미 한번 실패를 경험했잖아요. 저도 오빠를 다시 볼 수 있어 좋았어요. 우리 그냥 지금처럼 편한 사이로 지내요.”


위스키병이 텅 비었다. 친절한 바텐더가 크리스마스이브 기념으로 에그 녹(Eggnog)이라는 칵테일 두 잔을 가져다주었다. 그 순간에도 준규는 바텐더에게 감사의 인사를 잊지 않았다. 칵테일 잔을 잡으려던 그는 얼른 손을 다시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대책 없이 손이 마구 떨렸다. 그런 모습을 지민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마음에, 마음이란 것이 물리적으로 존재한다면, 엄청나게 큰 구멍이 생겼다. 그리고 그 안에서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취기 때문인지 어지러웠다. 자신의 서툰 고백으로 다시는 지민을 만나지 못하게 되리라는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 편한 사이로 지내자는 지민의 마지막 말이 그녀에게는 거절의 완곡한 표현이었지만, 준규에게는 망망대해 속에서 발견한 작은 등대 불빛과도 같았다. 게다가 그 고백 덕분에 그토록 궁금했던 이별 이유를 알게 된 것도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그는 포기도, 실망도 하지 않았다.


계절은 여지없이 봄을 지나 여름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여전히 가끔 만나 영화를 보았다. 겉으로 보기에 둘의 관계는 변함이 없었다. 어느 일요일 이른 아침 잔망스러운 휴대폰 벨 소리가 준규를 깨웠다.


“오빠, 생일 9월 16일이지요? 몇 시에 태어났는지 알아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아마 새벽에 태어났을걸. 근데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아니에요, 깨운 거면 미안해요. 더 자요.”


사실 계절의 여왕 5월, 유난히 하늘이 예뻤던 어느 날 준규는 두 번째 고백을 했다. 술은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지민은 마치 크리스마스이브의 자신을 연기라도 하듯 똑같은 말로 두 번째 거절을 했다. 심지어 표정과 손짓 하나까지 똑같았다. 밤늦도록 혼자 술을 마신 준규는 비틀대는 몸과는 달리 멀쩡한 정신으로 지민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 물론 술에 취하지 않았다는 믿음은 혼자만의 착각일 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은 문자를 보고 백만 번이나 이불 킥을 해댔다.


‘지민아, 나는 너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 널 사랑하기 때문만은 아니야. 그냥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하지만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너를 행복하게 해 준다면 나는 그걸로도 만족해. 지민아, 꼭 행복해야 해!’


술에 취해 보냈음이 분명한 신파조 문장이었지만, 짧은 글에 담긴 준규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지민의 행복이었다. 준규는 그렇게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거짓임을 스스로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은 반드시 그여야 한다는 외침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다행히 지민에게서 답장은 오지 않았다. 준규는 그녀가 자신이 보낸 문자를 부디 읽지 않고 삭제하기를 그가 아는 모든 신들께 간절히 빌었다. 소원이 이루어졌을까?


무더위가 정점을 찍던 8월 15일 광복절에 준규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고백을 했다. 다행히 준규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을 믿을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래도 세 번은 고백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3은 완전한 숫자이기도 하고 준규와 인연도 깊었다. 자기 합리화일지도 몰랐지만, 그는 그렇게 믿었다. 초등학교 내내 3반이었고, 중3 때부터 성적이 월등히 좋아졌으며 지민을 만난 것도 3학년 때라는 사실을 억지로 끼워 맞췄다. 그래서 세 번째 고백은 지민을 향한 것이라기보다 준규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지민을 포기해야 한다면 자신을 먼저 이해시키고 싶었다.


마지막 고백 장소가 포장마차였던 건 준규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저녁을 먹고 둘이 산책이나 할 겸 강남 뒷골목을 걷다 보니 누가 일부러 포장마차를 차려 놓기라도 한 것처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준규도 예상하지 못했던 세 번째 고백 기회가 그렇게 찾아왔다. 기본 안주로 나온 오이 냉채 국과 소주 한 병만 덩그러니 올려놓은 채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준규는 조용히 지민 앞에 소주 한 잔을 따라 주고 최후 변론을 하는 변호사처럼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세 번째이자 마지막이 될 고백을 했다.


“지민아, 나는 너에게 편한 오빠 이상은 아니겠지만,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있어. 서툰 고백에도 우리가 계속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고맙기도 하지만, 그것이 또 나를 힘들게도 해. 나는 여전히 같은 마음이고, 너도 네 마음에 변함이 없다면 이제 우리 그만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하지만 네가 우리가 함께 더 나아갈 수 있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생겼다면 이 잔을 비워주지 않을래?”


지민은 지그시 소주잔을 바라보았다. 준규는 그것이 긍정의 의미인지 부정의 의미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에서 누군가 스톱 버튼을 눌러 화면을 정지시킨 것처럼 두 사람은 그렇게 얼마나 멈춰 있었는지 모른 채 마주했다. 먼저 침묵을 깬 건 준규였다. 그는 떨리는 손을 애써 참으며 침착하게 지민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모든 게 끝났다. 그 순간 지민이 굳게 닫힌 입을 열었다.


“반은 남겨요, 내가 마실게요. 서툰 오빠한테 제가 졌네요.”

5화 그림.jpg <일러스트레이션 by 사비연필>

3이라는 숫자가 준규에게 행운을 가져다준 것일까? 그가 절망의 나락 속으로 발을 내디디려는 순간 지민이 기적처럼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를 향한 마음을 포기하려는 순간이었다. 간절히 원했던 답을 들었지만, 오히려 준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느끼지 못했다. 도서관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시간이 정지된 듯했다. 그 순간 환하게 웃고 있던 지민이 하얗고 긴 손으로 준규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자 마침내 그도 현실로 돌아왔다. 모든 게 꿈이 아니라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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