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의 소설) 너와 나의 연애소설
준규는 길고 긴 여행을 끝내고 집에 돌아온 듯한 기분을 느꼈다. 지민의 부재가 그를 항상 불행하게 만든 것만은 아니었다. 그에게도 현실이라는 벽이 놓여 있었고, 나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그는 세상에 길들여졌다. 세상에 익숙해져 갈수록 그는 가슴 한편이 텅 비어 있음을 눈치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허무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더욱 열심히 세상에 매달렸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셈이었다. 지민이 준규 손을 잡아주었던 날, 비로소 그는 빈 공간이 조금씩 차오르고 있다고 믿었다. 단지 사랑을 이루었다는 감정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꽉 찬 상태이자 일종의 완성을 의미했다. 비로소 그는 내면의 평화를 찾았다.
이쯤에서 독자들이 품을 법한 의문 하나를 해결해야 할 것 같다. 편한 관계로 지내자며 두 번이나 고백을 거절했던 그녀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이야기는 그저 그가 꾸는 한 여름밤의 꿈인 걸까? 사실 그녀 마음은 그녀 자신도 헤아리지 못했다. 심지어 가장 위대한 신 조차도 예측할 수 없다. 세 번째 고백의 마지막 단어를 듣는 순간까지도 그녀의 입장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우리 모두 경험이 있을지 모르겠다. 내 생각과는 다르게 행동하거나, 행동과 다르게 생각하는, 내가 내가 아닌 존재가 되는 그런 순간 말이다. 이날 지민이 그랬다. 포장마차 안 희미한 백열등 불빛은 그녀를 포함해 그곳의 밀도를 달리의 작품처럼 느슨하게 풀어헤쳐 놓았다. 게다가 차분함 속에 묻어나던 떨리는 그의 목소리에 그녀 안에 잠자고 있던 다른 자아를 깨워 대신 답하게 만들었다. 그의 손을 잡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그녀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순간 준규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지민은 차마 잡은 손을 놓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너무 순식간에 일어났고 그렇게 되리라 정해진 것 같았다. 완벽한 서사였다. 그녀도 그에게 스며들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연인 사이가 되었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아니 모든 일상이 특별해졌다. 똑같이 영화를 보고 밥을 먹었지만 이전과 같은 영화, 이전과 같은 밥이 아니었다. 모든 순간 행복했다. 준규는 평소에 과묵한 편이었지만, 지민과 만나면 수다쟁이가 되었다. 만나고 헤어진 날에도 전화기 너머로 수많은 이야기를 나웠다. 그런 모습이 무척이나 낯설었지만, 기분 좋은 변화라 여겼다. 둘이 만나서 지출하는 비용은 계속 반씩 부담했다. 왠지 이 문제만큼은 지민이 더 신경 썼다. 준규가 할 수 있는 건 틈틈이 지민에게 선물하는 것이었다. 비싸고 대단한 선물은 아니었다. 우연히 노점상을 지나가다 발견한 머리핀부터 예쁜 볼펜이나 다이어리, 시집이나 음반까지 다양했다. 그녀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었다. 연인이 되어 가장 좋은 건 언제든지 그녀에게 선물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비로소 그는 받는 기쁨보다 주는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을 책에서 배운 그에게는 엄청난 발전이었다. 한 번은 해외 출장을 다녀오면서 지민의 선물은 물론이고 그녀의 부모님 선물까지 살뜰하게 챙겼다. 몇 차례 해외 출장에도 자신의 부모님 선물은 챙기지 않던 그였다. 게다가 지민 생일에는 '꽃보다 예쁜 지민이를 낳아 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메모와 함께 그녀의 어머니께 꽃다발을 보냈다. 자칫 준규를 불효자식으로 만들 법한 비밀들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와 그의 부모님께는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꽃다발을 받은 지민의 어머니는 다소 당황하긴 했지만, 남편에게서 꽃을 받아본지가 너무 오래라 그 향기에 기분 좋게 취했다. 지민에게는 아주 평범한 어느 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바구니를 보냈다. '날이 좋아서…'라는 메모를 본 지민은 숨을 곳을 찾아 헤맸고 영화사 동료들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두 사람이 겨울 바다를 보러 강원도로 여행을 갈 때였다.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 지민이 바다가 보고 싶다고 흘린 말을 준규가 귀담아들은 덕분이었다. 아직 차가 없던 준규는 회사 동기에게 두 번이나 술을 사주고 어럽게 소형차를 빌렸다. 둘만의 첫 여행이었다. 바다와 가장 가까이 있다는 기차역은 사진 찍는 사람들로 붐볐다. TV 드라마에 방영된 이후 한적한 시골 기차역은 언제나 사람들로 넘쳐나는 관광지가 되었다. 그 틈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준규와 지민은 작고 조용한 항구를 찾았다. 낡고 오래된 배들이 드문드문 정박된 항구에서 지민은 오래도록 겨울 바다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갖는 시간의 여백을 온전히 누렸다. 준규는 그런 지민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칼날처럼 매서운 겨울바람도 사랑으로 충만한 두 사람을 피해 갔다.
그때 마침 작은 고깃배가 소금쟁이처럼 항구로 밀려 들어왔다. 두 사람은 조금 멀리 떨어져 이제 막 정박한 고깃배의 소요를 지켜보았다. 바다를 일터 삼는 사내들의 굵은 팔뚝과 잡아온 물고기를 나르는 여인들의 깊게 파인 주름에는 생기가 넘쳤다. 고된 삶의 현장은 치열하기보단 차라리 아름다웠다. 그때 허리도 곧게 펴지 못하는 할머니 한 분이 그들을 향해 손짓했다. 와보라는 의미였다. 쭈뼛거리며 두 사람은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할머니는 빨간 바구니에 든 대게 몇 마리를 가리키며 다리가 잘려나가 상품성이 떨어지니 싼 값에 처분한다며 준규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생활의 달인에게 꼼짝없이 사로잡혔다. 두 사람은 생각지도 않은 대게를 한 아름 안고 숙소로 돌아왔다. 수완가 할머니 조언대로 게딱지에 비벼 먹을 즉석밥과 간장, 참기름도 빼놓지 않았다. 바닷가가 보이는 하얀 펜션에서 생각지도 않은 대게 파티가 벌어졌다. 준규는 지민이 먹기 좋도록 하나씩 손질해 그녀 앞에 대게를 놓아주었다. 그가 누군가를 위해 이토록 정성스레 게 껍데기를 발라 준 건 처음이었다. 게에 정신이 팔려 한 잔씩 따라놓은 소주에는 입도 대지 못했다. 게딱지에 즉석밥을 넣고 간장과 참기름으로 비벼낸 밥은 얼마나 별미던지 쌀 한 톨 남기지 않았다. 시간이 막 10시를 넘어갔다. 1박 2일 여행의 완성, 밤의 절정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잠잘 시간이 다가오자 어색한 정적이 방안을 감돌았다. 준규가 용기 내 입을 열었다.
"너무 늦었다. 씻고 자야지?"
"네? 네."
"대게 냄새 때문에. 내가 바닥에서 잘게. 걱정하지 말고 침대에서 편하게 자.”
“불편하지 않겠어요?”
“그럼.”
지민은 편안한 침대에서 잠을 청했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불 끄고 한참이나 지났는데 잠들지 못했다.
“준규 오빠! 자요? 불편하면 침대에서 같이 자도 돼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규칙적인 숨소리만 들려왔다. 지민은 혼자 괜한 걱정을 했나 싶어 다시 잠을 청했다. 그때 준규가 잠들었는지는 신과 준규만이 알 수 있을 터였다. 사실 그날 밤 지민이 잠든 걸 확인한 준규는 조용히 숙소를 빠져나와 밤바다를 오랫동안 걸었다. 매서운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낸 그의 몸은 감기에 걸려 며칠이나 고생했다. 아무튼 준규의 행동 덕분에 지민 마음속에 있던 물음표들이 하나둘씩 느낌표로 바뀌어 갔다. 모든 일에 똑 부러지는 그녀에게도 연인관계는 여전히 미지의 세계였다. 소꿉장난 놀이 같던 캠퍼스 커플과는 차원이 달랐다. 지민 역시 서툰 것 투성이었다. 그녀를 위해 언제나 세심하게 배려해주며 적당한 거리에서 지켜봐 주는 그에게 더 큰 사랑을 느꼈다. 준규라면 자신이 누구이든, 어떤 모습이든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리라 믿었다. 서툰 연인들은 서로의 진짜 모습을 알아가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오빠, 이번 주말에는 영화 못 볼 것 같아요."
"왜? 무슨 일 있어?"
"그런 건 아닌데…. 부모님이 오빠 한번 보고 싶대요."
"나? 무슨 일 인대?"
"지난번 꽃 선물 너무 고맙다고요. 식사나 한번 하자고요.”
준규 기대보다 훨씬 빨리 두 사람 사이에 큰 변화를 가져올 특이점이 왔다. 주말 저녁 준규는 그녀의 집 앞에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우황청심환 하나를 꺼내 먹었다. 암스트롱이 인류의 큰 한 걸음을 내디뎠던 심정으로 심호흡을 한번 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지민 역시 얼굴에 '긴장'이라고 쓰여있었지만, 웃으며 그를 맞이해 주었다. 준규는 신발 벗기 무섭게 부모님께 큰절부터 했다. 누가 가르쳐 준 건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낯선 남자의 돌발 행동에 적지 않게 당황했지만 싫지만은 않은 눈치였다.
준규는 첫인사 때 어떤 선물이 좋을까 고민하다 언젠가 지민이 부모님이 애주가라는 말을 기억해 내고 로열 살루트 (Royal Salute)를 준비했다. 좋은 날 두 분이 함께 드시라고 했지만, 오늘만큼 좋은 날은 없다며 바로 식탁 위에 고풍스러운 위스키병이 올려졌다. 준규는 푸짐한 잔칫상 같은 음식들을 부지런히 먹느라 배가 터질 것 같았지만 밥을 두 공기나 먹었다. 어머니 음식 솜씨가 최고라는 칭찬도 잊지 않았다. 물론 인사치레로 한 말은 아니었다. 지민이 어머니를 닮아 미인인 것 같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때 지민의 아버지가 당신을 닮아 예쁜 것이라고 말해 모두 한바탕 웃었다. 지민의 부모님은 서글서글한 준규가 마음에 들었다. 평생 연애 한번 못할 줄 알았던 지민이 언제부턴가 집에 오면 남자 이야기를 꺼냈다. 물론 이야기의 주인공이 준규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생일날 꽃바구니도 그렇고 모르는 사람에게 자꾸 받기만 해서 얼굴 한 번 봐야겠다고 딸을 협박했다고 설명했다. 집을 나서는 준규에게 맛있는 음식 해줄 테니 자주 들르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딸자식 하나라 집안이 너무 조용했는데 이제 좀 사람 사는 집 답다고 했다. 준규는 한 달에 한 번은 찾아갔고 그때마다 따뜻하게 맞아 주시는 부모님과 편한 관계가 되었다.
계절이 바뀌듯 자연스럽게 지민도 준규네 집에 초대되었다. 지민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배후에는 그녀 아버지가 있었다. 집에 놀러 온 준규에게 언제부턴가 자꾸 그의 부모님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미련 곰탱이가 아닌 이상 그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아무튼, 준규 부모님 역시 첫눈에 지민을 좋아했다.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였고 외모며 성품도 흠잡을 데 하나 없었다. 특히 그의 어머니는 젊은 시절 당신을 보는 듯하다며 지민을 딸처럼 대했다. 그렇게 양가 부모님이 사윗감과 며느릿감이 마음에 들었으니 상견례 날짜가 잡히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지민과 준규는 결혼은 아직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부모님들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결혼이라는 어찌 보면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변화는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쏜살같이 진행되었다. 다음 해 초봄 상견례 자리에서 거나하게 취한 두 집의 아버지들은 둘도 없는 우정을 약속했고 그해 10월로 결혼식 날짜까지 정했다. 지민과의 사랑을 간절히 바랐던 준규조차 이렇게 빨리 결혼하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그였다.
결혼 준비를 하다 보면 많이 싸운다고 하는데 두 사람은 예외였다. 싸울 만한 여지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준비하는 과정 하나하나가 행복했다. 두 사람이 함께 고른 결혼식장은 변두리 작은 호텔이었지만 결혼식을 찍어 내는 공장 같지 않은 소박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주례는 두 사람의 은사인 서병준 교수한테 부탁했다. 서병준 교수는 자신이 두 사람 결혼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듣고 흔쾌히 주례를 맡았다. 혼수라고 부를만한 것도 별반 준비할 게 없었다. 준규가 사는 작은 전셋집으로 지민이 들어오기로 했다. 신혼살림을 시작하기에 턱없이 비좁았지만, 벽지와 장판을 교체하니 제법 신혼집 분위기를 뿜었다. 두 사람은 할 수 있는 한 부모님 도움을 받지 않고 그들만의 힘으로 시작하려 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계획된 듯 두 사람의 결혼은 물 흐르듯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