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 읽는 그림책 : 망태 할아버지가 온다 (박연철 글·그림)
사내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 아빠라면 아마 이해할 것이다. 하나 있을 때 보다 두 배가 아니라 서너 배, 아니 열 배는 더 힘들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어서, 순하디 순한 천사 준과 귀여운 매력덩어리 큐를 함께 돌보는 일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사실 힘들다는 말은 에둘러하는 수사적 표현일 뿐이다. 현실을 절반도 담아내지 못한다. 그렇게 다들 힘들다고 하니 아이 낳는 것이 무섭다고, 걱정된다고 하는 예비 부모님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된다. 힘든 점이 1이라면 좋은 점이 99이니까. 그저 힘듦을 침소봉대(針小棒大)하는 것이니 놀라지 마세요. 아무도 여러분을 해지지 않습니다.
아이 혼자 있으면 바라만 보고 있어도 행복하다. 손도 많이 가지 않는다. 순정만화의 한 장면이다. 그토록 애틋하고 사랑스러울 수 없다. 천사가 지상으로 내려오면 아이의 모습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조물주는 어머니의 모습이니까 일면 타당해 보인다. 그럼 아버지는 뭐지?) 하지만 천사 같은 아이가 둘이 있다면 어떨까? 모든 것이 변한다. 3D 액션 만화가 된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모두 공감하는 '만능 치트키'가 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기술의 속도를 염려하면서도 감사한 것은 감사해야겠다. 잡스형! 고마워요. 아이폰을 만들어줘서. 아이폰과 아이패드에서 시작된 이동 가능한 모니터가 부모에게 선사한 것은 비단 '밥 먹을 짬'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유였다. 비록 완전하고 불가역적인 자유는 아니었지만, 찰나의 방심도 허용되지 않는 육아 전선에서 1시간은 수많은 역사를 만들 장구한 시간이다. 그러니 식당에 갔을 때 아이 앞에 휴대폰이나 아이패드가 놓여 있다고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모들에게도 밥 먹을 시간을 허(許)해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이는 당신을 위한 배려이기도 하다.
아무리 뽀통령 뽀로로라고 해도, 귀여운 꼬마버스 타요라고 해도, 무적의 변신로봇 또봇이라고 해도 아이들의 주의력을 1시간 이상 잡아두지 못한다. 저명한 인지심리학자가 체계적인 실험을 한 바는 없지만,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라면 누구나 안다. 현장이 중요한 이유다. 그런 상황에 대비해 부모들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하나 더 있다. 가능한 공개적인 장소에서 꺼내기를 꺼리는 어둠의 흑마술, 바로 '망태 할아버지'다.
망태 할아버지는 70~80년대 뽀로로 같은 존재였다. 물론 정반대의 의미에서다. 호랑이보다, 곶감보다 더 무서운 게 망태 할아버지였다. 울고 불고 떼쓰는 아이도 '망태 할아버지 오신다'라고 하면 울음을 뚝 그쳤다. 본 적도 없고 누구인지도 모르는 '정체불명의 대상'을 나를 포함해 다수의 아이들은 왜 그토록 두려워했을까? 추측하건대 그것은 '망태 할아버지'라는 말을 할 때 발현되는 부모님의 '기세(氣勢)' 때문일 터였다. '욕은 텍스트가 아니고 콘텍스트다'라는 명언처럼 (제가 지은 말 입니다만…) 순수한 아이들은 망태 할아버지라는 존재가 아니라 이를 말하는 부모님의 기세에 놀라 울음을 멈추고 떼쓰기를 멈춘 것이라 추론한다.
준에게 망태 할아버지는 무서운 존재가 아니었다. 망태 할아버지가 백 번, 천 번을 와도 소용없었다. 하지만 준이 무서워한 것은 '아저씨'였다. 준이 잠을 자지 않고 보채거나 고집을 피울 때 "아저씨 온다"라고 한 마디만 하면 상황이 해결되었다. 여기서 아저씨는 특정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일반명사로써 아저씨였다. 특별히 아저씨라고 불릴만한 사람과 안 좋은 기억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어떤 이유에서 아저씨라는 말이 준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는지 밝혀내지 못했지만, '아저씨'를 통해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큐의 경우는 또 달랐다. 망태 할아버지, 아저씨 모두 아무 의미 없었다. 준의 사례만 믿고 야심 차게 꺼낸 '아저씨'라는 히든카드가 무용지물이 되어 무척 당황했다. 그렇다고 큐에게 아무것도 통하지 않았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큐에게는 '와타나베 히로코'가 그런 존재(말)였다. 와나타베 히로코가 누구인지, 이런 이름이 실제로 있는지도 사실 모른다. 내 입에서 나오긴 했지만 왜 하게 되었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우연이 우연했다. 하지만 '와타나베 히로코 온다'를 소환하는 순간 큐는 천사가 되었다. 그때 깨달았다. 아이들이 두려워하는 건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 말을 하는 부모의 기세라는 것을.
에너지가 넘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내아이 둘을 잠자리에 들게 하는 것도 여간 힘들지 않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만화를 보여 준다거나 망태 할아버지를 소환하는 것은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아저씨와 와타나베 히로코도 마찬가지다) 경험상 가장 좋은 방법은 잠자리에 드는 'ritual (의식, 절차)'을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우리 집의 경우에는 "저녁 식사 → 따뜻한 물에 목욕 → 그림책 읽어주기"로 ritual을 만들었다. 이렇게 세 단계를 거치면 아이들은 으레 잠자리에 들었다. 가끔 읽어주어야 하는 그림책이 늘어나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애교였다. 아이 재우기가 힘든 분들께 강력하게 추천한다. 매일 12시를 넘기고 퇴근하는 남편에게 공동 육아를 기대할 수 없던 아내가 다년간의 현장 경험으로 완성한 생활 밀착형 노하우다. 99% 효과를 보증한다.
박연철 작가님의 그림책 <망태 할아버지가 온다> 덕분에 오래된 사진을 꺼내보듯 준과 큐 아기 때를 회상해 보았다. 이 작품에서 아이가 망태 할아버지를 무서워하는 이유는 엄마가 그랬기 때문이다. 엄마가 망태 할아버지의 허상(虛像)을 아이에게 심어주었다.
"망태 할아버지는 정말 무서워. 말 안 듣는 아이를 잡아다 혼을 내준대. 우는 아이는 입을 꿰매 버리고 떼쓰는 아이는 새장 속에 가둬 버리고 밤늦도록 안 자는 아이는 올빼미로 만들어 버린대."
망태 할아버지는 이 세상 모든 나쁜 아이들을 잡아다 얌전하고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로 만들어 돌려보낸다. 돌아온 아이들은 모두 같은 증표가 붙은 옷을 입는다. 마치 Pink Floyd의 'Another Brick in the Wall' 뮤직 비디오를 보는 듯하다. 아이는 엄마의 부당한 요구에 저항하고 어느 날 밤 망태 할아버지가 잡으러 온다. 그런데 누구를 잡으러 온 걸까? 엄청난 반전 덕분에 <망태 할아버지가 온다>를 읽고 한참이나 웃었지만, 뒷맛이 개운하지는 않았다. 여러모로 육아에 대해서 생각할 게 많은 의미 있는 작품이기도 했다.
육아는 힘들다. 정~~~말 힘들다. 포유류 중에 이토록 긴 돌봄이 필요한 종(種)은 오직 인간뿐이다. 인류는 자연에 가장 적합한 상태로 진화했다. (사실은 그 반대이지만) 그렇다면 왜 여전히 인간에게 힘들고 어려운 육아를 오랜 시간 감당하도록 진화한 걸까? 문제가 있었다면 개선할 시간은 충분했으리라! 자기(自己) 존속이 모든 생명체의 궁극적 목적이다. 이를 위해서 성숙한 생명체로 살아가기까지 돌봄이 필요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더 조심스럽게 밀어 넣어 본다. 더 많이 사랑해주고, 더 많이 안아주라고 말이다. 긴 돌봄의 시간은 결국 돌봄으로 치유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