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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Feb 20. 2021

나의 층간소음 극복기

그렇게 우리는 이웃이 되었다

 "코로나 19 확산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로 실내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면서 층간소음 분쟁도 덩달아 급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일 한국환경공단 이웃사이센터에 따르면 코로나 19가 본격적으로 확산한 지난해 집계된 층간소음 관련 민원은 4만 2250건으로 전년보다 무려 61%나 급증했다." 

                                                                                                (매일경제, 2021년 2월 19일)


 살인충동까지 느낀다는 층간소음 문제가 코로나로 더욱 심각해지는 모양이다. (모든 게 다 코로나 때문이다!) 관련 민원 증가율이 실로 어마어마하다. 접수된 건수만 파악한 것이 저 정도라면 실제로는 얼마나 더 심각할까? 비대면 수업, 재택근무 등으로 삶의 방식이 전환되면서 아이들도, 직장인들도 집에 있는 시간이 부쩍 늘어났으니 어쩌면 예견된 상황이었다. 펜데믹이 종식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얼마나 더 심각해질지 모른다. 층간소음으로 이웃 간 폭행 사건이 벌어지거나 심지어 살인 사건까지 발생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뉴스 한 꼭지를 장식한다. 그런 뉴스를 볼 때마다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등 뒤로 식은땀 한 방울이 떼구루루 굴러간다. 


 이걸 한번 상상해 보자. 5천만 원짜리 고급 승용차 한 대를 장만하러 자동차 전시장에 갔다. 마침 평소 점찍어둔 세단이 있다. 외관도 인테리어도 고급스러우니 너무 마음에 든다. 하지만 딜러에게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고 또 확인한다. 딜러는 전문가답게 만족할만한 답을 내놓는다. 그래 결심했다. 이제 남은 건 시승뿐! 운전대를 잡고 도로를 누빈다. 그런데 뭔가 찜찜하다. 자꾸 이상한 잡음이 들려온다. 이렇게 고급 세단에서 엔진 소음이 들릴 리 없는데…. 그렇게 예민한 사람도 아닌데 자꾸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그렇다면 그 차를 구입하겠는가? 5천만 원이나 지불하고? 아마도 대부분 사람들은 다른 차를 알아보지 않을까 싶다. 


 승용차보다 몇 배는 비싼 아파트를 구입하는데 '층간소음 문제'는 복불복이다. 위층에 아이 많은 부부라도 입주(이사)하면 인상을 팍 구기며 앞으로 어떻게 '투쟁'해야 할지 고민부터 된다. 운이 좋아 조용한 노부부가 산다면 당장 달려가 절이라도 할 판이다. 여기서 궁금한 건 이런 점이다. 왜 그토록 비싼 아파트에 '층간소음'은 충분조건인가? 왜 '층간소음' 문제가 입주민들이 얼굴 붉히며 싸워야 하는 문제로 당연시하는가이다. 애초에 '층간소음'이 없는 아파트를 만들면 되지 않겠는가? 그것이 정녕 불가능한 일인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음모론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층간소음이 이슈가 될 때마다 정말 궁금했다. 수억에서 수십억에 이르는 아파트에 살면서 왜 층간소음 문제로 그 돈을 지불한 사람들이 서로 싸워야 하는가 말이다. 누가 그렇게 만드는가? 싸움에서 이득을 보는 자, 그가 범인이다. 


 에너지가 넘치는 사내아이 둘을 키우는 우리 집도 '층간소음'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소음 유발자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셋이나 있다. 아무리 좋게 봐도 평균 이상으로 층간소음을 유발한다. 하지만 10년을 넘게 살면서 층간소음으로 문제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모두 천사 같은 이웃(아래층 입주민) 덕분이다. 10년 동안 두 번 바뀌었는데 운 좋게도 두 집 모두 천사, 아니 그 이상이다. 만약 행운에 총량이 있다면 우리는 모두 여기에 그 행운을 사용했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아침, 저녁으로 주의를 주지만 '네'하고 말 듣는 아이들이 아니다. 그나마 아기였을 때는 가벼워 콩콩거렸다면 이제는 걷기만 해도 쿵쿵이다. 아파트는 여럿이 함께 사는 공간이라고 잔소리를 해도 귓등으로 듣지 않는다. 총싸움이나 칼싸움을 하는 건 예삿일이다. 처음 보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우리 부부도 아래층이 이사 오는 날 인사를 갔다. 그 뒤로 왕래가 잦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명절 때 찾아가 인사를 드리는 건 당연하고, 집에 좋은 선물이 들어와도 아래층과 나눈다. 텃밭에서 나오는 제일 좋은 오이나 애호박, 쌈채소도 먼저 갖다 드린다. 그럼 마음씨 좋은 아래층 아주머니, 아저씨도 그냥 계시지 않는다. 케이크나 쿠키처럼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을 주시기도 하고 심부름 간 아이들에게 용돈을 쥐어 주시기도 한다. 큰 아이는 안 받겠다고 사양하다 끝내는 난처한 얼굴로 받지만, 둘째는 꾸벅 인사를 하고 얼른 받는다. 아무리 조심해도 얼마나 '층간소음'을 유발하는지 너무 잘 아는 우리로서는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다. 죄송스러운 건 말할 것도 없고. 


 얼마 전 바로 위층에 젊은 부부가 이사를 왔다. 귀여운 사내아이도 한 명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한번 만났는데 두 돌 정도 지났을까 싶다. 애기 엄마가 저희가 좀 시끄럽죠 하며 세상 죄는 자기가 다 지은 것처럼 고개를 푹 떨구며 인사했다. 아내가 괜찮다고 하자 얼굴이 더 발그레해진다. 사실 이른 새벽부터 아이가 뛰는 소리가 콩콩 들린다. 가수가 되려는지 우는 소리도 우렁차다. 게다가 얼마나 에너지가 넘치는지 잠시도 쉬지 않는다. 하루는 방에서 숙제를 하던 둘째가 '너무 시끄러운 거 아니야, 저 꼬마?' 한다. 아내가 코웃음을 친다. '너희 둘에 비하면 저건 뛰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자기 일(공부)에 집중해.' 그리고는 아래층이 얼마나 위대한 분들인지 새삼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위층 아이가 일부러 뛰는 것도 아니고 고맘때 아이들이 다 그렇지 않은가? 이해하려고 마음먹으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싶었다. 게다가 그 '귀여운' 얼굴을 벌써 보아버리지 않았던가? 아래층이 우리에게 관대했듯이 우리도 위층에게 관대하려고 노력한다. 이럴 때만 세상은 참 공평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이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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