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의뢰인

한뼘소설

by 조이홍

닥터 K는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온몸에 전극 하나하나가 부르르 떨렸다. 슬픈 꿈을 꾸었다. 정체 모를 괴한이 그의 머리에 총을 쏘는 꿈이었다.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짐작 가는 바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괴한이 총을 발사하는 순간 마스크가 벗겨졌고 낯선 얼굴과 마주했다. 분명히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괴한의 얼굴을 보자 그 짧은 시간에 눈물이 흘렀다. 물론 진짜 눈물은 아니었다. 정교한 디지털 신호가 눈물 흘린다고 느끼게 해주는 것뿐이었다. 죽음 앞에서도 닥터 K는 자신이 왜 눈물을 흘리는지 궁금했다. 꿈에서 깬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마침 시계가 정각 8시를 알렸다. 출근할 시간이었다. 서둘러 집을 나서 병원으로 향했다.


킬러 H는 의뢰인의 거주지와 동선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오늘이 그날이었다. H는 AI 통제를 받는 NPC(Non-Player Character)였다. 메타버스에서 H의 역할은 디지털 인간, 즉 아바타를 소멸시키는 것이었다. 기후재앙으로 폐허가 된 지구에서 인간의 육체는 나약했다. 아니, 불필요했다. 메타버스 세계로 전환된 지 한 세기가 지났지만, 일부 아바타는 여전히 인간적인 낭만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불멸의 길을 포기하고 스스로 소멸을 택한 그들은 고전적인 방법으로 메타버스에서 사라지기를 원했다. 기술적으로 디지털 인간은 자살이 불가능했다. 세계 정부와 AI는 공식적으로 소멸을 금지했다. 그러나 그들의 암묵적 동의하에 킬러 H와 같은 존재가 활동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번 의뢰는 조금 특별했다. 인간의 지적 능력을 수천 배 뛰어넘은 킬러 H로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얼마 전 경미한 사고가 발생했다. 여성 아바타가 스스로 소멸한 사건이었다. 디지털 인간에게 자살이란 선택지는 없었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무결점의 메타버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버그는 발견 즉시 수정되었다. AI는 자살한 아바타의 남편과 사후 대책을 협의했다. 유족 보상 명목으로 남편에게 새로운 기억과 성공한 외과 의사로서의 삶이 주어졌다. 아내 기억은 전부 지웠지만 '그리움'이라는 이미지까지 삭제할 수 없었다. 이번 의뢰인이 바로 그 남편, 외과의사였다. 의뢰인이 자기를 죽여달라며 밝힌 이유는 '중요한 걸 잃은 상실감' 때문이라고 했다. 무언지도 모르는 상실감 때문에 영원한 소멸을 택하다니, 킬러 H는 인간 아바타에 대해 공부할 게 많았다.


킬러 H는 '외형 변화' 모드를 통해 자살한 아내 아바타로 변신했다. 특별한 의도는 없었다. 어차피 남편은 기억을 삭제해 그녀를 알아볼 수 없을 터였다. 그녀에게 죽임을 당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했다. 이런 인간적인 호기심은 완벽한 디지털 존재인 킬러 H에게 좋지 않은 신호였지만 이번에는 왠지 그렇게 하고 싶었다. 구형 권총에 탄알을 장전한 H는 의뢰인의 집을 향해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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