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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Apr 07. 2021

신비한 마법 주전자

따뜻한 무심함의 기다림

 집에서 사용하는 그릇들은 대부분 아이들이 직접 만들었다. 어려서부터 도예를 배워 처음에는 아기자기한 장식품을 하나둘씩 만들어오더니 언제부턴가 제법 쓸만한 생활용품을 만들어 가져왔다. 네 식구가 함께 밥 먹을 때 사용하는 밥그릇과 국그릇 그리고 반찬 담는 접시까지 모두 아이들 작품이다. 예술 작품에 밥을 담아 먹다니, 이런 호사가 없다. 기분 탓인지 밥맛도 더 좋다. 아이들이 만든 그릇은 꽤 튼튼하고 모양도 제법 그럴듯해 다소 무겁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식탁 위에 당당하게 올랐다. 손재주(특히 예술 관련)가 없는 나로서는 아내를 닮은 아이들의 재능이 참 부러웠다.

<수저를 제외한 모든 식기가 아이들 작품이다>

 아이들이 만들어온 작품 중에 식탁 위에 놓여 그저 장식품으로만 취급받던 주전자 3종 세트가 있었다. 주전자는 숙련도를 요구하는 어려운 작업이었던지 귀여운 모양과 달리 기능성이 다소 떨어져 보였다. 사용하기에는 무언가 애매모호했다. 그러다 '하루 물 3리터 마시기'를 도전하게 되면서 그중 하나를 차 주전자로 사용하게 되었다. 정수된 물만 마시니 지겨워진 아내가 다양한 차로 마시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낸 덕분이었다. '저 주전자 사용할 수 있는 거였어?"라고 물었더니 아내는 '당연한 걸 왜 묻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주전자가 이상했다. 램프의 요정 지니는 살고 있지 않았지만 신비한 마법을 부렸다.  


 주전자에 담긴 물을 머그잔에 따를라 치면 늘 바닥이 흥건하게 젖었다. 물이 줄줄 샜다. 어떤 때는 잔보다 바닥에 흐른 물의 양이 더 많았다. 그릇과 달리 주전자는 만들기 어려워서 결함이 있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아내가 물을 따를 때는 한 방울도 새지 않았다. 이게 무슨 도깨비 조화란 말인가! 수차례 시행착오 끝에 나의 물 따르기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물 따르는데 무슨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잘못될 게 무엇이 있을까? 


 적어도 이 주전자에는 비법이 있었다.   

 한 손으로 주전자 손잡이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뚜껑을 단단히 잡는다. 그리고 최대한 천천히 물을 따라야 한 방울도 새지 않았다. 급한 마음으로 부으면 그만큼 주전자는 물을 바닥으로 흘려보냈다. 다도(茶道)의 예를 갖추고 차를 대하는 것처럼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후 절제되고 섬세한 손놀림으로 움직여야만 했다. 조선 후기 승려이자 서예가인 초의(草衣)가 지은 차 전문서 '동다송(東茶頌)'에는 다도에 대하여 '따는 데 그 묘()를 다하고, 만드는 데 그 정()을 다하고, 물은 진수()를 얻고, 끓임에 있어서 중정()을 얻으면 체()와 신()이 서로 어울려 건실함과 신령함이 어우러진다.'라고 일컬었는데, 바로 그 다도의 정수가 신비한 주전자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물 따르는 비법을 완전히 파악한 이후에도 물은 가끔씩 샜다. 마음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귀신 같이 알아챘다. 대충 물 한 잔 따라 마시면 되겠지 마음먹으면 여지없이 식탁 위를 물바다로 만들었다. 자세를 갖추고 두 손으로 천천히 정성스레 따라야만 마실 수 있는 물 한 잔, 주전자는 내게 깨달음을 주었다. 며칠 전 문득 든 생각이었다. 주전자가 이런 신비한 힘을 갖게 된 이유는 만든 이의 혼(바람이나 소망)이 투영되었기 때문이라고, 둘째 Q가 마음 급한 아빠가 조바심 내지 말라고 간절히 빌었기 때문이라고. 




 아이들이 걸음마를 떼고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무렵에는 언제나 아이들이 앞장서 걸었다. 아내와 나는 뒤에서 흐뭇한 '부모 미소'로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몇 번은 재빨리 달려가 일으켜 세워주기도 했지만, 대개는 혼자 힘으로 일어나기를, 그래서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를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기다려 주었다. 의도된 따뜻한 무심함으로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기다림이 익숙한 시절이었다. 요즘에는 동네 뒷산이든 한라산이든 설악산이든 아이들과 함께 등산을 하게 되면 뒤에 처지는 아이를 재촉하기에 바쁘다. '확찐자' 되기 싫으면 엄마, 아빠처럼 열심히 걸으라 은근한 협박도 가한다. 따뜻한 무심함은 불편한 조바심으로 바뀌었다. 화합과 치유를 위한 여행에서 고성이 오가는 건 예삿일이 되었다. 어디 산행만 그러한가!


  잘하면 더 잘하라 재촉하고 뒤처지면 뒤처지지 말라 닦달한다. 걸으면 뛰어가라 하고, 뛰면 쉬지 말라고 한다. 가끔은 나조차도 해낸 적 없는 일을 너무나 당연하게 해내라 한다. 과도한 경쟁 시스템을 비판하면서도 '그게 다 너를 위한 거야'라는 말로 기꺼이 경쟁으로 밀어 넣는다. 이제 따뜻한 무심함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루돌프 사슴 코다. 일 년에 한 번 크리스마스이브에만 나타난다. 언제부턴가 아이보다 한참 앞에 서서 뒤돌아 언제 오냐고, 빨리 오라고 재촉하기에 바쁘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말은 이미 입을 빠져나와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아이를 관통한다. 아차 싶어도 이미 때는 늦었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 더 불행한 방법을 택하고 후회한다.  


 신비한 주전자는 Q의 간절한 소망 속에 탄생한 진짜 마법 주전자일지도 모르겠다. 그 옛날 한없이 기다려주던, 보지 않는 듯 보는 무심한 돌봄 속에서 따뜻하게 바라봐 주던 그때의 아빠를 되찾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마법. 조금 천천히 걷는 듯 보여도 따뜻한 차 한잔 마시는 시간이면 어느새 옆에 와 나란히 걷고 있을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언젠가는 혼자 걷게 될 길이고, 또 언젠가는 미래의 아이들 뒤에서 따뜻함 무심함으로 바라봐줄 부모로 성장할 아이들이 그 길을 지치지 않고, 조금 늦더라도, 꾸준히 걸어갈 수 있도록 돕는 아빠가 되어 주고 싶다. 


 이 글은 또 한 번 나의 다짐이며 아이들과의 약속이다. 지키지 않으면 신비한 마법의 주전자가 따뜻한 차 한잔을 내어주지 않는 벌을 내릴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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