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뼘소설
자리로 돌아온 H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릿속이 멍했다. 아내와 이제 막 첫돌이 지나 귀여운 앞니가 네 개나 난 딸아이가 웃고 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 석 달간 오늘을 위해 야근도, 주말 출근도 마다하지 않은 그였다. 대리라는 직급으로 꿈도 꾸지 못할 임원회의에 참석하게 된 건 브랜드 매니저라는 직책 때문이었다. 시장분석과 소비자 인사이트, 경쟁사 동향과 주요 정책까지 총망라한 신제품 개발 프로젝트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자료 하나하나가 H의 손에서 만들어졌지만, 발표는 팀장이 했다. 영어 PT인 데다 주니어 레벨인 H가 나설 자리도 아니었다. 대신 발표할 팀장에게 고맙다는 인사까지 했다. 사사건건 참견하기 좋아하는 임원들의 질문에 대비해 CMO에게 자신의 참석을 요구한 건 팀장의 배려였다.
H가 노력한 만큼 회의는 대성공이었다. 대표이사는 즉시 각 부서별로 과장급 이상 실무자를 모아 프로젝트 팀을 구성하라며 CMO와 CFO에게 지시했다. 회의가 끝나자 CMO와 일부 임원들이 팀장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그때 CMO가 H를 자신의 방으로 조용히 불렀다. H는 자신을 격려해주리라 믿었던 CMO에게서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다음 달 영업팀으로 전보되리라는 내용이었다. 사유는 마케팅 부서에 필요한 역량이 부족하다는 팀장의 평가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 3개월 간, 아니 2년간 업무 시간에 주식이며 골프 관련 사이트를 서핑하는 팀장을 대신해 실질적으로 팀을 꾸려나간 H는 말문이 막혔다. CMO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하려다 그만두었다. MBA 출신의 명석한 보스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업무 능력이 뛰어난 직원이 아니라 상사의 자리를 위협하지 않는 말 잘 듣는 직원이 필요했나 보다. 회사에서는 그걸 '팀워크'라고 불렀다.
H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처럼 정시에 퇴근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시간에 회사를 나서는 건 입사 5년 만에 처음이었다. 사무실에서 나오는데 마침 엘리베이터가 그를 기다렸다. 건물 밖으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려는데 집으로 가는 버스가 정류장으로 막 들어서는 게 보였다. 저 버스를 놓치면 30분을 기다려야 했다. 조마조마했다. 버스가 막 출발하려는 순간 경쾌한 신호음과 함께 파란불이 켜졌다. 한걸음에 달려 버스에 올라탔다. 한 자리가 남았다.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자리에 앉은 H는 창밖을 보았다. 어스름 저녁의 도시 풍경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꺼내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은 참 운이 좋은 날이라고 말했다. 전화기 너머로 해맑게 웃는 아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