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 속 절정의 한 평 텃밭이 내어준 선물
약 1만 2천 년 전 발생한 농업혁명으로 인류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식량으로 유랑 시대가 끝나고 정착 시대가 도래했다. 그 후 수천 년 동안 거름과 박쥐 배설물 같은 자연산 비료를 사용한 인류는 1908년 두 명의 독일 화학자 프리츠 하버와 카를 보슈가 질소와 수소로 암모니아를 만드는 방법을 개발하면서 다시 한번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합성 비료를 대량으로 생산하면서 식량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공기를 비료로, 그리고 다시 빵으로 만드는 혁신적인 기술을 완성한 공로로 두 사람은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이것이 그 유명한 하버-보슈 법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의 시대가 찾아왔고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비약적인 식량 생산이 이를 뒷받침했고 이는 다시 인구 증가를 초래했다. 늘어난 인구로 더 많은 식량이 필요했고 합성 비료의 사용 역시 큰 폭으로 증가했다. '대가속 시대'(인간 활동의 자취가 1950년을 전후해 폭발적으로 증가했음을 보여준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인류에게 큰 선물이었던 합성 비료도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합성 비료를 사용해 인공적으로 식물에 질소를 공급하면 토양 속 미생물들은 질소 생산을 멈춘다. 자연이 가진 회복력이 저하된다. 합성 비료를 만들기 위해 암모니아가 필요한데 이 과정에서 온실가스가 배출됨은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땅에 뿌려진 비료는 절반 이하만 식물이 흡수하고 나머지는 땅속으로 흡수되거나 물에 스며들어 환경을 오염시킨다. 아산화질소 형태로 대기 중으로 빠져나가기도 한다. 아산화질소는 이산화탄소보다 265배나 더 심각한 지구온난화 효과를 일으킨다.
<빌 게이츠,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에서 읽었던 내용이다. 안 읽었으면 모를까 책을 읽고 해마다 텃밭에 뿌려주던 합성(질소) 비료를 더는 뿌려줄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어차피 시장에 내다 팔 것도 아니고 우리 가족, 이웃과 나누어 먹는 채소들인데 질소 비료 사용하지 않아도 상관없겠다 싶었다. 내주면 내주는 대로 감사하기로 했다. 계분은 이미 봄이 시작되기도 전에 뿌려주었고 아내에게 부탁해 음식 만들고 모아둔 계란 껍데기도 부지런히 날랐다. 틈나는 대로 잡초를 뽑아주고 물을 주었지만 부지런한 농부는 못 되었다. 어느덧 그 텃밭이 여름의 절정에 다다랐다. 일찍 끝난 장마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일조량(무더위)에 지난해 보다 조금 일찍 찾아왔다.
30센티미터 넘는 길쭉길쭉한 오이를 열댓 개 내어주던 오이는 이제 끝물이다. 합성 비료를 사용하지 않아도 다른 어떤 해보다 유난히 굵고 길었다. 오이의 성장에는 일조량과 물공급이 중요하다고 들었는데, 거의 비도 오지 않았고 물도 자주 주지 못한 것에 비하면 오이한테 미안할 정도로 풍년이다. 풍부한 일조량 덕분이라고 짐작해 본다. 수확한 오이는 거의 신(神)급 요리 수준을 자랑하는 장모님께 대부분 갖다 드린다. '간장 오이지'로 탈바꿈한 오이는 이전까지 맛보지 못했던 전혀 다른 식감의 반찬이 된다. 먹고 있는데도 먹고 싶은 맛이다. 오이지 반찬 하나만 있어도 밥 한 공기 뚝딱이다. 그러니 두 군데서 자라는 오이 숫자가 적게 느껴졌다. 지난해에 비하면 확실히 적기도 했다. 앞으로 서너 개 정도 더 수확하면 올해 오이 농사는 끝이다. 참, 아쉽다.
상추, 케일, 청겨자, 샐러리는 이른 장마가 시작되면서 작별했다. 청겨자는 흉년, 나머지는 풍년이었다. 특히 샐러리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수확하고 돌아서면 다시 그만큼 자란다고 느낄 정도였다. 바질 대신 태국식 덮밥에 넣어 요리했는데 그 이상으로 맛이 좋았다. 아내가 내년에는 샐러리만 심어도 좋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샐러리를 입에 대지 않던 아이들도 태국식 덮밥은 맛있게 먹었다. 특히 채소를 싫어하는 둘째 아이가 더 좋아했다. 어렸을 때 마요네즈 선전(그 시절에는 광고라고 안 하고 선전이라고 했다)에서 큼지막한 샐러리에 마요네즈를 뿌려서 '아삭'하고 한입 베어 먹는 장면이 있었다. 그 장면 때문인지 아직도 샐러리는 마요네즈를 찍어 먹는 게 가장 맛있다. 깻잎은 이제 전성기다. 엄청 올라와서 다 먹지 못할 정도다. 모종으로 두 개를 심었는데 무려 깻잎이 다섯 군데서 자라고 있다. 도대체 나머지는 어디에서 왔는지 미스터리다. 깻잎 자연 발생설인가! 아무튼 쌈 채소들은 합성 비료 없이도 잘 자라주었다.
파테크로 심었던 파는 딱 한번 수확했다. 파는 줄기를 잘라주면 뿌리가 강해진다고 유튜브에서 보고 얼른 한번 잘라주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다. 자른 부위에서 다시 파가 자란다 싶더니 이내 시들해지고 지금은 거의 흔적도 남지 않았다. 한두 뿌리 정도만 겨우 자리를 지키고 있다. 파는 화분에 별도로 심었는데 아무래도 너무 좁은 공간에 빽빽하게 심은 게 화근인 듯싶다. 텃밭을 가꾸면서 욕심을 버리고 적당히 심으려고 노력했는데 치솟는 파 값이 잠깐 이성을 마비시켰다. 올해 처음 시도했으니 내년에는 좀도 잘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가지는 아픈 손가락이다. 모종 한 개를 싶었는데 웬일로 쑥쑥 자라는가 싶더니 곧고 예쁜 가지는 하나도 수확하지 못했다. 허리가 많이 휜 불쌍한 녀석 세 개가 전부였다. 유독 가지는 우리 텃밭과 궁합이 맞지 않는 작물 중 하나였다. 시장에서 살 수 있는 곱디 고운 자태의 가지를 수확한 적은 거의 없었다. 다른 텃밭에 입양 갔으면 빛깔도 모양도 고운 가지를 많이 내어주었을지도 모를 녀석인데 괜히 미안했다. 비료를 안 줘서 그런가 싶었지만, 사실 질소 비료를 잔뜩 주었던 과거에도 결과는 비슷했으니 나와 인연이 없는 채소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가지야, 이젠 안녕!
반면에 고추는 처음으로 풍년이다. 진짜 농부의 눈으로 보면 '고작 그걸로?' 할지도 모르겠다. 청양 고추, 오이 고추, 롱 그린, 일반 고추 등 모종으로 다섯 개 심었다. 솔직히 어떤 게 청양 고추이고 어떤 게 오이 고추인지 모를 정도로 크기가 비슷했다. 시장에서 파는 오이 고추나 롱 그린 고추를 보면 입이 턱 하니 벌어질 정도로 탐스러웠는데 텃밭에서 수확한 녀석들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모종을 심고 한동안 시들시들했던 녀석들을 애달프게 바라보며 비료를 줘야 하나, 올해도 고추와는 인연이 없나 보다 생각할 정도로 반쯤 포기했으니 이 정도 자라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군대에 가기 전까지 고추를 먹지 못했다. 된장이나 고추장에 고추를 찍어 먹는 아버지나 누나들을 보면 눈이 휘둥그레졌다. 매운 것은 맛이 아니고 '통증'이라고 생각한 나였으니 당연했다. 군대에 가서, 그것도 병장으로 GOP 생활할 때 처음으로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어 보았다. 어른이 되었다. 아니, 어른 입맛이 되었다. 어릴 때 누나들이 고추 하나 다 먹으면 백 원 줄 테니 도전해 보라고 놀리곤 했다. 한 입 베어 물고 포기했었더랬다. 지금 하면 엄청 잘할 수 있는데 말이다. 가끔 아이들에게도 천 원을 걸고 도전을 유도하지만, 영특한 아이들은 몸에 좋은 고추는 아빠 많이 드시라며 내 앞으로 접시를 쑥 밀어준다. 세상에 이런 효자들이 없다!
대추 방울토마토는 풍년, 일반 토마토는 그럭저럭이다. 토마토도 매해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방울토마토는 잘 자라는데 그냥 토마토는 언제나 자라다 만다. 토마토는 벌써 대부분 빨갛게 익어 수확했는데 방울토마토는 여전히 푸르르다. 토마토는 쑥쑥 자라지 않는 반면, 방울토마토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란다. 무섭다 싶을 정도로 뻗어나가는데 제발 그만 자라라고 말할 정도다. 토마토는 과실까지 다 익고, 방울토마토는 대부분 익지 않았다. 이름만 같고 다른 종이다 싶을 정도로 두 녀석은 참 다르다. 토마토는 크기도 다양한데 큰 녀석은 제법 통통하고, 작은 녀석은 방울토마토보다 크기가 못하다. 방울토마토한테 무시당하지 않게 열심히 보살폈는데 새끼손톱만 한 녀석을 보면 웃음도 나오고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오늘 복숭아만큼 예쁜 두 볼을 가진 토마토를 따왔다. 너무 귀여워 아내 그림 앞에 두고 사진을 찍었다. 그 녀석이 표지를 장식했다. 토마토와 방울토마토를 볼 때마다 우리 아이들이 떠오른다. 닮은 듯 너무 달랐다. 똑같은 일조량, 똑같은 수분, 똑같은 영양분에도 다른 결과를 낳았다. '정답은 없다.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중요하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따라가지 않는다. 한 평 텃밭에서도 삶을 배운다.
호박은 거름을 많이 주어야 잘 자라는 작물이다. 올해는 비료를 주지 않아 솔직히 호박 농사는 기대하지 않았다. 뜻밖에 호박이 대풍년이다. 상추가 떠나고 샐러리가 떠나고 케일이 떠난 한 평 남짓 텃밭을 장악해 버린 장본인이 바로 호박이다. 작은 호박 하나를 깜빡 잊고 따지 못했는데 며칠 후 텃밭에 올라가 보니 둘째 아이 얼굴의 두 배가 되었다. 이 정도로 큰 호박은 맛이 없어서 급하게 장모님 댁으로 호송 보냈다. 어떤 환상적인 반찬이 되어 돌아올지 기대가 크다. 나머지 호박은 된장찌개에 넣어 먹기에 적당한 크기로 수확했다. 하지만 날씨가 너무 더운 관계로 아직 된장찌개와 만나지 못했다. 아내는 밭에서 따온 호박을 냉장고에 차곡차곡 저장 중이다. 텃밭에서 사방으로 자라는 호박은 앞으로 얼마나 많이 열매를 맺을지 모르겠다. 은근히 옆 텃밭도 위협 중이다. 비료도 주지 않았는데 역대급으로 자라는 걸 보면 참 신기했다. 그렇다고 무작장 잘 자라는 건 아니다. 호박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과정에서 작은 호박이 떨어지기도 하고 꽃이 잘 떨어지기도 한다. 줄기가 마구 뻗어나가 텃밭을 정글로 만드는 버리는 것에 비하면 호박 수확량이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다. 이제 호박은 내 손을 떠났다. 무섭게 자라 버려 어디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난감하다. 8월 말까지 호박을 수확할 수 있다고 하니 가을 무 심기 전까지 기다려 볼 참이다.
합성 비료를 사용하지 않았더니 농사가 더 잘 되었다? 아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먹을 것이니 가능하면 환경에 부담을 주지 않고 텃밭을 가꾸고 싶었다. 한 평 텃밭에서 내어주는 대로 수확하면 그만이다. 이전 글에서도 몇 번 언급했지만 지금껏 한 평 텃밭에서 나고 자란 작물을 다 먹지 못 했다. 올해는 샐러리, 오이, 호박 정도만 나눠 먹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농사를 업(業)으로 하시는 분들은 농약이나 비료 사용은 피할 수 없다. 생계가 걸린 일이니까. 그래서 CGIAR(국제농업연구협의그룹) 같은 국제기구에서 가뭄과 홍수에 강한 옥수수나 밀을 연구한다. 질소 비료를 사용하지 않아도 무럭무럭 잘 자라는 품종도 개발되면 좋겠다. 자연과 공존하면서 살아가는 것, 지금은 선택이 가능하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너무 잘 알지만 자꾸 핑계를 만들어 그 선택을 늦춘다.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피해를 보는 것은 우리 자신인데도 말이다. 부디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