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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Oct 01. 2021

프롤로그 : 아내는 그리고 남편은 쓰다

<제주를 그리다 - 그림 에세이>를 시작합니다

 내게 제주는 제3의 고향 같은 곳이다. 제1의 고향은 당연히 태어나고 자란 곳, 제2의 고향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곳, 제3의 고향은 아내와 함께 노후를 보내고 싶은 곳이다. 아직 제2의 고향에 머물고 있으나 언젠가는 제3의 고향 제주로 이주를 꿈꾼다. 말 그대로 꿈에 머물지도 모르지만, 꿈을 갖는다는 건 아직 심장이 힘차게 뛰고 있다는 증거이므로 그것대로 의미가 있다. 이런 꿈을 갖게 된 건 8할이 아내 덕분이다. 아내는 제주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아내에게 '제주'는 천국의 다른 이름이다. 그저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맑아지는 에메랄드빛 바다와 온종일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해도 무료하지 않은 한적한 바닷가 모래사장, 한 발 내딛는 것만으로도 어머니 품에 안기는 듯 포근함을 전해주는 한라산과 360여 개의 오름들, 걷는다는 행위가 '이동'이 아니라 나를 발견하는 '치유'의 과정임을 깨닫게 해 준 올레길까지 제주의 풍광은 소박함마저 눈부시다. 누가 그런 제주와 사랑에 빠지지 않을까 싶지만, 특히 아내는 제주에 발 닿는 순간부터 첫눈 내린 날 아무도 걷지 않은 새벽길을 내달리는 강아지처럼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른다. 제주라는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제주는 아내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제주의 첫인상부터 좋았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내가 제주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그해 대전에서 엑스포가 열렸다. 친구들과 자전거로 전국 일주를 계획했다. 대전에서 엑스포를 관람하고 목포를 거쳐 제주까지 갔다가 부산을 통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친구 두 명과 함께 작당했는데 출발 일주일 전까지 아무도 부모님께 허락을 받지 못했다. 자전거 여행은 위험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순진했던 건지 용기가 없었던 건지 부모님께 호기롭게 믿고 보내달라고 하지 못했다. 결국 기차를 타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주에 발을 디뎠다. 예정에 없던 기차 삯을 지출하니 안 그래도 가벼운 대학생 주머니 사정이 더욱 궁핍했다. 제주 향토음식이나 회를 먹기는커녕 매끼를 직접 해 먹었다. 주 요리는 수제비였고 요리사는 내가 맡았다. 그전에 수제비를 해 본 경험이 없었다. 할머니나 어머니가 해주시던 것을 어깨너머로 몇 차례 본 게 전부였다. 두툼하게 썰어 넣은 감자와 덜 익은 밀가루가 한데 어우러진 수제비에서 어떤 맛을 기대할 수 있을까? 친구들은 제주 여행 이후 다시는 수제비를 입에 대지 않는다고 했다. 피난길도 아닌데 제주에 대한 첫 기억은 온통 수제비로 얼룩졌다.  


 아내가 처음 제주에 가게 된 것은 나와 연애를 시작한 이후였다. 아내에게 여동생이 있었는데 결혼 전에 친목 도모도 할 겸 세 사람이 함께 제주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런데 하필 여행 전날 가장 친한 친구 결혼식이 있었다. 애주가는 아니었지만 술을 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한 잔이 두 잔, 두 잔이 넉 잔, 넉 잔이…. 결국 공항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에 일어나기는커녕 숙취에 뻗어있었다. 잠에서 깼는데 부재중 전화가 열 통이나 와 있었다. 밝은 대낮인데도 세상이 캄캄했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먼저 제주에 가 있으라고 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음 비행기로 제주에 도착하겠다고. 주말이라 제주행 비행기에 빈자리가 있을 리 없었다. 무작적 공항으로 달려갔다. 기다림 끝에 기적처럼 한 자리가 나왔다. 제주 공항에서 불콰한 얼굴로 아내와 처제를 만났다. 무려 네 시간이 지난 후였다. 아내에게 제주의 첫인상은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여행객들이 수없이 지나가는 것을 우두커니 바라보아야 했던 무료한 토요일 오후 제주공항의 풍경이었다.


 제주는 하루아침에 꽃이 되지 않았다.


 가족 구성원이 하나둘씩 늘어나면서 제주 이곳저곳에 우리의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갔다. 십오 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흘렀다. 첫째 아이가 아장아장 걷던 한적한 협재해변의 뜨거운 모래사장과 해변 입구 허름한 구멍가게에서 먹던 성게국수 속에서, 둘째 아이가 무척 좋아했던 우도 서빈백사의 새하얀 홍조단괴와 오설록 티 박물관의 녹차 아이스크림 속에서, 태풍을 뚫고 오른 신비로움이 가득한 백록담에서도 이야기는 싹을 틔웠다. 절정은 제주 한달살이였다. 하루하루가 꿈만 같았다. 그게 벌써 2019년의 일이다. 한 해도 제주를 거르지 않았는데 두 해를 건너뛰다니…. 이 모든 게 망할 놈의 코로나 때문이었다.


 제주 앓이를 시작하면서 제주에 관한 글을 몇 편 썼다. 아내는 눈에 담아 두었던 제주의 풍경을 그림으로 그렸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전문적으로 글과 그림을 배우지는 않았다. 그래도 손이 여문 아내의 그림은 내 눈에 유명 화가의 작품 못지않게 감동을 주었다. 집안일하랴 아이들 뒷바라지하랴 바쁜 아내는 시간을 쪼개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물론 하루에 점 하나 찍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았다. 그래도 아내는 그림 그릴 때 행복하다고 했다. 내가 글 쓸 때 행복한 것처럼. 아내에게 제안했다. <아내는 그리고 남편은 쓰다>라는 콘셉트로 제주 그림 에세이를 만들어 보자고. 아내는 남에게 보일만한 실력아 아니라며 싫다고 했다. 내 눈에는 콩깍지가 씌어 멋있게 보이는 거라고. 그럴지도 몰랐다. 하지만 행복하게 쓰고 행복하게 그리면 보는 이들도 행복해지리라 생각했다. 그것이 솔직함의 힘이기도 했다. 아내 그림을 누구에겐가 자랑하고 싶기도 했다.

<숲, 100 x 100, 아크릴 & 오일 파스텔>

 아내가 오랜 기간 습작을 끝내고 처음으로 그린 작품 <숲>이다. 평소 식물을 무척이나 아끼는 아내는 나무나 숲을 그리는 게 즐겁다고 했다. 아내는 제주 어딘가를 떠올리며 그린 그림은 아니라고 했지만, 나에게는 왠지 사람 손때가 묻지 않은 제주의 원시림처럼 보였다. 문득 숲 안쪽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다. 마치 거대한 원시림이 인간에게 무언가를 꽁꽁 숨겨놓으려는 듯하다고 감상평을 전했다. 아내는 그런 의도는 없었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고 했다. 창작자는 세상에 내놓을 뿐, 해석은 관람자의 몫이라는 멋진 말을 남기고 숲 속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아내의 뒷모습에서 알 수 없는 아우라가 비췄다.


 아내의 어릴 적 꿈은 화가였다. 오랜 시간을 돌아왔지만 아내는 화가가 되었다. 물론 아직은 내게만 그렇지만, 머지않아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화가가 되리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아내는 그리고 남편은 쓰다 (제주를 그리다 - 그림 에세이>작지만 위대한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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