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2일, 호랑이 해니까 호랑이 그림책이지!
인스타그램에 '크리스마스 그림책'을 소개하느라 아이들 책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더랬다. 새해도 맞이했고 여기저기 널브러진 크리스마스 그림책도 정리할 겸 모처럼, 3년 만에, 책장 정리를 했다. 사실 아이들 책장 정리를 제대로(아내 마음에 들게) 하려면 온전히 하루를 쏟아부어야 했다. 3년 전, 첫째 아이와 단 둘이 오롯이 주말 이틀을 반납한 덕분에 1,000권 넘는 그림책을 '출판사'별로 , 아내가, 보기 좋게 정리했었다. 도서관 사서 선생님이나 서점 직원분들, 동네책방 책방지기님들의 노고를 온몸으로 뼈저리게 느꼈다. 혼자 그렇게까지 할 자신은 없었다. 집안 여기저기 뒹구는 그림책들을 빈 책장마다 채워 넣는 것으로 만족했다.
책장 정리를 하다 문득 궁금했다. 임인년(壬寅年) '검은 호랑이의 해'를 맞이했는데 과연 우리 집에 호랑이 그림책이 몇 권이나 있을까? 아이들 어릴 때 무릎 위에 앉혀 두고 읽어주던 몇 권의 그림책이 퍼뜩 떠올랐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막상 찾으려고 하자 눈에 띄지 않았다. 아내를 호출하고 여전히 가끔 그림책을 읽는 둘째 아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렇게 몇 권의 호랑이 그림책을 찾아 오랜만에 다시 읽어 보았다. 긴긴 겨울방학, 유치원은 이미 방학이 끝났지만, 아이에게 읽어 줄 그림책이 필요하다면 호랑이의 해, 호랑이 그림책도 좋을 성싶었다. '무쓸모의 쓸모'지만 오늘은 제법 쓸모 있을 호랑이 그림책을 소개해 볼까 한다.
기억은 왜곡되기 쉽다지만 거짓말 조금 보태 천 번 이상 아이들에게 읽어 주었을 <팥죽할멈과 호랑이>. 네버랜드 우리 옛이야기 그림책이라 CD(오디오북)까지 있어 아이들과 외출할 때나 여행 갈 때 차에서도 많이 들었더랬다. 알밤, 자라, 물찌똥, 송곳, 돌절구 등등이 “할멈, 할멈, 팥죽할멈, 뭣 때문에 우는 거유?”하던 대사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 팥죽도 착취하고 먹고 할멈도 잡아먹으려는 욕심 많은 사용자 호랑이의 계획은 힘없고 보잘것없는 존재들의 단결 투쟁 협동으로 무산된다. '호랑이 그림책'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Top of mind 1위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릴 그림책이 아닐까 싶다. 지금 읽어도 재미있는 걸 보면 '이야기의 힘'이란 정말 대단하다.
<하얀 눈썹 호랑이>는 천 살 넘은 호랑이 이야기다. 여기서 호랑이는 빌런이 아니다. 어떤 존재 건 천 년 정도 살면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될 터, 하얀 눈썹의 호랑이는 사실 산신령(옛날이야기에서는 거의 신급 존재)이나 마찬가지다. 신령한 힘을 가지고 있어 곧잘 '인간'으로 변신해 인간 세상으로 마실 나오기도 한다. 권선징악, 착한 사람은 돕고 나쁜 사람은 벌을 준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이 맑은 한 소녀가 호랑이의 비밀을 눈치채는데…. <하얀 눈썹 호랑이>는 둘째 아이가 특히 좋아했던 그림책이었다. 물론 지금은 손도 대지 않지만.
<간식을 먹으로 온 호랑이>는 유럽(독일에서 태어나 영국에 정착한) 작가의 그림책이다. 솔직히 '이런 그림책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생소했다. 스토리는 무척이나 간단하다. 호랑이가 아니라 고양이라고 해도 이야기 전개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 소피와 엄마가 간식을 먹으려는 찰나 초인종이 울린다. 배고픈 호랑이가 찾아왔다. 소피는 부엌을 샅샅이 뒤져 배고픈 호랑이를 위해 먹을거리를 챙겨준다. 계속 배 고파하는 호랑이가 소피를 잡아먹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배부른 호랑이는 작별인사를 하고 쿨하게 집을 떠난다. 음, 역시 호랑이에 대한 문화적 차이 때문일까? 미지근한 결말에 내가 더 당황스러운 그림책이었다.
<어이쿠나 호랑이다>는 아직 우리나라 야산에 호랑이가 살던 시절, 마을에 내려와 사람을 헤치거나 가축을 잡아먹는 호랑이에 관한 이야기다. 무엇이든 잘 잡는 장백이는 영실이네 송아지를 물어간 호랑이를 잡겠다고 산으로 향한다. 산에서 장백이는 진짜 호랑이를 잡는 포수를 만난다. 역사에는 만약이란 없다지만 조선시대 후기나 일제 강점기에 그렇게 호랑이 사냥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설악산이나 지리산 깊은 곳에 호랑이가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라디오에서 아직도 우리나라 야생에 호랑이가 살고 있다고 믿는 분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조금 무섭긴 하지만, 동물원 말고 우리나라 야산 어딘가에 호랑이가 살고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철없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림책 덕분에.
<호랑이를 탄 엄마>는 뭐랄까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호랑이 동화다. 옛날이야기에 빌런으로 등장하는 호랑이가 현대의 거리를 활보하는데, 하필 온종일 회사일로 녹초가 된 엄마의 퇴근을 방해한다. 엄마와 만나는 호랑이는 죄다 '회사 사람 누구'처럼 굴어 엄마의 속을 뒤집어 놓는다. 과연 엄마는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가 관전 포인트다. <호랑이를 탄 엄마>는 마치 추상화가의 작품 같다. 알면서도 모를 것 같은. 그렇다고 왠지 나만 모른다고 하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그림 말이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씨익'하고 미소가 지어지니 끝까지 집중해야 할 그림책이다.
<팥빙수의 전설>은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고 협박하는 타노스급 빌런 호랑이가 등장하는 옛날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그림책이다. 거기에 우리가 좋아하는 '팥빙수'의 전설을 기발하게, 동화스럽게, 접목시켰다. 수박, 딸기, 참외, 팥죽을 장에 내다 팔려고 길을 떠난 할머니 앞에 포동포동 살찐, 눈사람 아니 눈호랑이 같은, 하얀 호랑이가 나타나 "맛있는 거 주면 안 잡아먹지." 하며 위협한다. 할머니에게 딸기, 참외, 수박을 차례차례 뺏어 먹은 호랑이는 마침내 뜨거운 팥죽까지 가로채는데…. 뜨거운 팥죽을 먹은 호랑이는 그만 녹아내리고 그간 먹은 재료와 함께 팥빙수가 된다. 기발한 상상력에 박수를! 아이들보다 내가 더 재미있게 읽은 그림책이다.
<이야기보따리를 훔친 호랑이>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라는 옛날이야기를 재해석한 그림책이다. 이야기의 큰 틀은 옛날이야기에서 따왔지만, 내용은 전혀 다르게 전개된다. 어릴 때 엄마에게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를 들은 작가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 호랑이가 늘 가여웠단다. 그래서 <이야기보따리를 훔친 호랑이>가 세상에 나왔나 보다. 배고픈 호랑이는 할머니를 통째로 삼키고 내친김에 아이들까지 잡아먹으러 간다. 평소 할머니에게서 문단속 교육을 철저히 받은 아이들은 문은 열어주지 않고 이야기를 해달라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삼킨 할머니를 뱉어 내고 '이야기'의 세계에 서서히 빠져 드는 호랑이. 액자식 구성으로 그림책 속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이야기 '두꺼비 등에 팥고물 뿌린 호랑이'를 듣고 배꼽을 잡고 웃는데…. 결국 호랑이는 할머니의 이야기보따리를 훔쳐 '행복한 이야기꾼' 호랑이가 된다.
'호랑이 그림책'을 찾다보니 '토끼'가 등장하는 그림책도 생각보다 무척 많았다. 내년이 '토끼 해'니까 미리미리 토끼 그림책 조사도 좀 해두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