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8일, 돈에 관한 아주 얕은 지식들
누군가 가로 154mm, 세로 68mm 종이에 '오만 원'이라고 써 물건을 구입한 대금으로 지불하면 아마 당장 철창신세를 지게 될 것이다. 세계 어디에도 개인이 화폐를 발행하는 경우는 없다. (그걸 비트코인이 해냈으니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오직 국가만이 화폐를 발행하고 조정할 권리를 가진다. 대체로 경제학자들은 화폐(돈)의 기원을 네 가지로 보고 있다. 상품·서비스의 교환, 부채 해결, 물품에 대한 가격 책정, 그리고 부의 축적이다. (최근 역사학자들에 의해 아즈텍, 마야 문명권에서 '조세 징수'를 위해 화폐를 사용했다는 증거가 발표되고 있다) 경제활동을 위해 만들어진 돈이 모든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역할을 담당하면서 '부의 상징'이 되었고, 화폐에 관한 모든 권한을 국가가 갖게 되면서 '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금융을 지배하면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이 빈말은 아닐 터였다.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유럽은 쑥대밭이 되었지만, 비교적 역사가 짧은 미국은 세계 최강자가 될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대량으로 무기를 생산해 유럽에 판매해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이를 바탕으로 파운드화를 몰아내고 달러를 국제통화로 내세웠다.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을 탄생시킨 브레튼우즈 협정(1944년)에서 미국 달러화를 기축 통화로 하는 금환본위 제도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30년 뒤에는 브레튼우즈 체제의 종식과 함께 달러와 분리된 금은 국제통화 무대에서 사라졌고, 달러는 금을 대신해 세계 최강의 화폐가 되었다. 달러화가 국제통화로 사용되는 한 세계 최대 강대국이라는 미국의 위치는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달러화 역시 유동성 문제와 신뢰성 문제라는 양자의 딜레마, 즉 트리핀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다. 달러의 안정을 위해 미국이 흑자를 유지하면 국제무역의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반대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미국이 적자를 유지하면 붕괴의 길을 면치 못하리라는 것이다. 미국은 자국의 채무를 상환하는 대신 달러를 대량으로 찍어내 채무 상환의 부담을 낮추려 하고 있는데, 이러한 달러의 통화 팽창은 국제사회에 심각한 왜곡을 초래할 수 있다. 게다가 코로나로 유동성을 크게 늘린 미국이 긴축 통화 조짐을 보이자 세계 주식 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우리 주식 시장 역시 '바닥'을 모르고 매일매일 하락하고 있다. 이러다 지하로 들어갈지도 모를 일이다. 국제사회가 수십 년간 이어진 달러의 독주를 끝내고 세계 단일 통화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설 연휴가 시작되기 전에는 으레 자주 가는 은행에 들리곤 했다. '신권'을 바꾸기 위해서다. 대체로 한가한 은행들도 요맘때만 되면 신권을 찾는 사람들로 무척이나 붐볐다. 빳빳한 신권이든, 꼬깃꼬깃한 구권이든 액면에 쓰인 돈의 가치는 모두 똑같을 터인데 사람들은(나 역시) 신권을 교환하기 위해 은행으로 질주했다. 신권에서는 덜 마른 잉크 냄새가 났다. 그 냄새가 썩 좋지는 않았지만 양가 부모님이나 조카들에게 세뱃돈을 건넬 때 신권을 준비하면 괜히 기분이 좋았다. 이는 '돈의 가치'에 더해지는 '마음의 가치'였다. 코로나로 고향에 가지 못하고, 가더라도 형제가 많아 날짜와 시간대를 정해서 서로 얼굴 보기도 힘들어졌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어린 조카들에게 세뱃돈을 건네며 덕담 한 마디하는 재미도 함께 사라졌다.
문득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보다 궁금해졌다. 우리나라 화폐 앞 장에 누가 있는지는 대부분 알지만 뒷면에 뭐가 있더라 궁금했다. 마침 한국조폐공사에 화폐 도안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어 쭉 살펴보았더니 그 안에 담긴 내용이 참 많았다. 혹시 아이들에게 세뱃돈을 건넬 때 이런 이야기도 함께 해주면 좋을 듯해 소개해 볼까 한다.
5만원권 디자인 앞면에는 신사임당 초상과 함께 그녀가 그린 '묵포도도'와 '초충도수병'의 가지 그림이 배치되어 있다. 신사임당 표준 영정은 현재 강릉시 오죽헌에 모셔져 있으나, 그 모습이 신사임당 생존 당시인 16세기 두발과 복식의 모습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화폐 도안용 측면화 영정을 새로 제작했다고 한다. 뒷면에는 세로 방향의 월매도와 풍죽도를 배치했다. 월매도는 조선 중기 매화 그림으로 이름을 떨쳤던 문인화가 어몽룡의 작품으로 둥근달을 배경으로 곧게 서 있는 매화나무를 그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라는 뜻의 풍죽도는 마찬가지로 조선 중기 묵죽화가로 이름을 떨친 탄은 이정의 작품이다.
1만원권 디자인은 세종대왕을 전면에 배치하고 한국의 5대 명산(북한산, 덕유산, 지리산, 설악산, 한라산)과 해, 달, 소나무를 그린 일월오봉도(조선시대 궁궐 안 왕이 앉는 자리 뒤에 놓아 왕권을 상징하는 병풍 장식으로 사용)와 용비어천가를 배경으로 하였으며, 뒷면 소재로는 세종대왕 시절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측정하던 혼천의, 천상열차분야지도(별들을 하늘의 십이차 및 분야에 따라 그려 놓은 천문도)와 보현산 천문대에 있는 국내 최대 천체망원경(구경 1.8m)의 이미지를 디자인으로 사용했다.
5천원권 디자인은 율곡 이이를 전면에 배치하고 조선 전기에 지어진 율곡이 태어난 오죽헌(몽룡실)과 오죽을 배치하였으며, 뒷면 소재로는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8폭 병풍(신사임당초충도병)에 있는 그림을 이미지화 배치했다.
1천원권 디자인은 퇴계 이황을 전면에 배치하고 성균관 유생들이 글을 익힌 명륜당을 배경으로 퇴계선생이 생전에 가장 아꼈던 매화나무를 이미지화하였고, 뒷면 소재로는 도산서원( 퇴계 이황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의 주변 산수를 담은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를 담았다.
현재 화폐 도안에 사용된 역사적 인물들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면면이 훌륭한 위인들이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부자연스럽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괜히 그런 느낌이다. 갑자기 헌법 전문이 떠올랐다. 전문 어디에도 우리나라가 조선을 계승한다는 말은 없는데 말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ㆍ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ㆍ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ㆍ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화폐 도안 출처는 모두 조폐공사 홈페이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