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배신하지 않는다

언제라도 꺼내 쓸 수 있게 곳간을 채워두길

by 조이홍

1년 전쯤에 '한뼘소설'이라는 걸 기획하면서 아래처럼 포부를 밝힌 바 있다.


"SNS에 최적화된 짧은 소설을 써봐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용기와 위로를 건네는 글은 쓸 역량이 안되고, 책이 점점 우리 사회와 멀어지는
현실이 우려되어 대안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예전처럼 책과 친해지기 어렵다면
적당한 중간 지대를 만들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MZ 세대의 잇템인 인스타그램을 매개체로 활용해서요. 장르명을 '한뼘소설'이라고 붙여봤습니다.
제가 만든 말은 아닙니다만 제 의도에 딱 들어맞는 말입니다.
1,000 ~ 1,500자 분량의 짧은 글을 '스마트 소설'이라 부르는데
그보다 훨씬 짧은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브런치에 올린 한뼘소설은 인스타그램 피드용으로 편집해 계속 업로드했다. 단순히 편집만 한 게 아니라 일부 문장은 다듬고 고쳤다. 읽고 또 읽다 보니 어색한 문장이 제법 눈에 띄었다. 나름 한두 차례 퇴고를 더 거친 셈이다. 완성된 글을 읽고 혼자 뿌듯했었던 적도 많았다. 마음에 드는 문장과 만날 때였다. 내가 아직 인스타그램에서 '한뼘소설가'나 영향력이 큰 '인플루언서'가 되지 못한 걸 보니 한뼘소설이 딱히 성공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확실히 한뼘소설은 다른 피드, 주로 책이나 그림책 소개 그리고 제주 사진보다 '좋아요'가 적었다. 인스타그램의 특성상 화려한 이미지가 아닌 텍스트가 주목을 받기에는 역부족인 측면도 있었을 터였다. 게다가 글자 수도 너무 많지 않았던가! 그래도 댓글을 달아 주시며 공감해 주는 열혈독자분이 있어 지치지 않고 계속 올릴 수 있었다. 성공은 아니었지만 분명 실패도 아니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서툰 글에 공감해 주신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순교자-001.png
순교자-002.png
순교자-003.png
소저너의-후예-_1권_-001.png
소저너의-후예-_1권_-002.png
소저너의-후예-_1권_-003.png

사실 한뼘소설을 쓴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나만의 '소설 냉장고'나 '소설 곳간'을 만들어 두고 싶었다. 소재가 고갈되고 아이디어가 마르면 언제라도 마음 편하게 꺼내 먹을(쓸) 수 있는 '영감(靈感)' 저장소 말이다. 이미 많은 작가들이 이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을까 싶지만, 내가 아는 한 이 방법을 가장 잘 활용하는 작가는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아닐까 싶다. 그의 단편집에 있는 짧은 소설들 중 일부가 장편으로 소개되었고 작가 스스로도 그런 방식으로 글을 쓴다고 밝혔더랬다. 꽤 괜찮은 창작 방법이었다. '누가 네 아이디어를 가로채면 어떻게 하려고?' 걱정할 수도 있다. 지금 세상에 온전히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을까 생각해 보면 회의적이다. 우리는 여전히 '로미오와 줄리엣', '카사블랑카', '오만과 편견'의 다양한 변주에 감동받지 않는가! 누가 쓰고 어떻게 쓰느냐가 결국 조정래 작가님이 이야기한 개성과 창의력 아니겠는가! 그리고 나는 믿는다. 내 글들이 나를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최근에 200자 원고지 100매 분량(A4 10매)의 단편소설 초고를 끝냈다. 쓰리라 예상하지 못했던 SF 장르였다. 이 작품의, 등단하지 못한 작가는 습작이라고 해야 하지만, 출발 역시 한뼘소설이었다. A4 반 장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를 A4 10장으로 길게 썼다. 조정래 작가님이 말한 대로 소설가의 기본은 갖춘 셈이다. 플롯을 만들고 배경을 설정하고 캐릭터를 탄생시키자 문장이 그 안에서 자유롭게 뛰어놀았다. (오해하지 마시길, 제 기준에서 그랬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쓸 수 있을까 싶었는데 정말 써졌다. 무척이나 묘한 경험이었다.


'픽스 업(fix-up) 소설'이라는 개념이 있다. 장편 소설처럼 보일 것을 목적으로 비슷한 소재들의 모아 만든 소설이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가 대표적인 픽스 업 소설이다. 그는 발표했던 단편 소설들을 집필 순서에 상관없이 가상의 연도를 붙여 연대순으로 배열했다. 다음 목표는 픽스 업 소설이 될 것 같다. 그리고 이번에도 한뼘소설은 꺼내 먹기 좋은 영감 저장소 역할을 톡톡히 해내리라 믿는다. 지금까지 써왔던 글을 쭉 살펴보니 꺼내 먹을 글이 제법 많았다. 마치 오래도록 입지 않은 정장 안주머니에서 숨겨두고 까먹었던 비상금이 나온 것처럼 횡재한 기분이었다.


글 쓸 때 행복하다고 느끼지만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다. 가끔 여기(브런치)에서 왜 이러고 있지 현타가 올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고쳐먹는다. 어디서 네 서툰 글로 관심받을 수나 있냐고. 브런치에 써 놓은 글들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다독인다. 언제라도 꺼내 쓸 수 있게 곳간을 채워두어야 한다.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드디어 첫 가족 독서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