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 때리는 그녀

아내가 축구를 시작했다.

by 조이홍

'무한도전'의 열혈팬이던 우리 부부는 무한도전 종영 이후 텔레비전 앞을 떠났다. 잠깐 '도시 어부'와 조우했지만 반복되는 플롯이 지겨워 오래가지 못했고, 재탕, 삼탕으로 초심을 잃은 '삼시 세 끼'에게도 아쉽지만 작별을 고했다. '놀면 뭐 하니?'가 겨우 무한도전의 명맥을 이어갔지만, 김태호 PD가 MBC를 떠나면서 우리 마음도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함께 떠났다. 덕분에 독서량이 대폭 늘어났지만 그리 즐겁지만은 않았다. <화씨 451도>의 세계관처럼 텔레비전에 중독된 세상도 문제지만 현대 문명의 정점을, 사실 그 자리를 오래전에 스마트 폰에 내주었지만, 외면하는 것도 조금 문제 있다 싶었다. 그런 우리 부부를 다시 텔레비전 앞에 앉힌 건 다름 아닌 '골 때리는 그녀들'이었다. 긴박감도 기술도 스피드도 없던, 물론 지금은 경기력이 상당히 좋아졌지만, 어설픈 축구 경기에 매료당한 건 축구를 향한 그녀들의 순수한 열정 때문이었다. 무한도전조차 본 방송을 사수하지 못했던 우리는 골 때리는 그녀들 만큼은 본 방송을 시청하려고 무진장 노력했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 늦게 시청해야 하기에) 특히 축구에 1도 관심 없던 아내가 나보다 더 좋아했다.


동네에 몇 달째 '여자 축구 부원 모집'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골 때리는 그녀들을 아내와 함께 시청하다 보면 자연스레 화제가 그쪽으로 이어졌다. 수영과 마라톤을 접수한 아내에게 축구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골 때리는 그녀들 덕분에 아내가 축구에 부쩍 관심을 가졌지만, 사실 일찌감치 아내에게 축구를 해보라고 몇 번이나 권한 나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재능'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농구에서는 큰 키가 재능이다. (슬램덩크 참조) 그렇다면 축구에서는? 굵은 허벅지와 장딴지가 재능이다. 아내는 축구에 최적화된 신체를 가지고 태어났다. 신의 은총을 받았으니 그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이 아내의 운명일 터였다. 이 나이에 무슨 축구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아내가 결국 원데이 클래스에 다녀온 게 벌써 한 달 전이었다. 처음 다녀오고 축구가 이렇게 재미있는 스포츠였냐며 한 차례 더 다녀온 아내는 모든 포지션이 가능한 자신이 진짜 '축구 천재'가 아닐지 합리적인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누누이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신이 내린 축구 천재라고….


아내의 신체 조건과 맞먹는 선수가 '골 때리는 그녀들'에 합류했을 때 무릎을 탁 쳤다. 시즌1에서 꼴찌를 기록한 'FC 개벤져스'에 그녀가 있었더라면 최소한 3위 안에 들었을 거라고 아내에게 종종 말하곤 했다. 그 선수는 요즘 '적토마'라 불리며 최상의 컨디션으로 활약하고 있다. 아내는 자신과 그녀가 닮은 점은 1도 없다고 항변했지만, 나는 안다. 아내도 그녀도 신이 내린 축구 선수라는 걸. 그리고 아내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걸.


아내가 미용실에 다녀왔다. 머리를 기르면 아름다운 아내가 더 아름다워 보이지 않겠냐며 제발 머리 좀 길러달라고 빌고 또 빌어도 아내는 평생 쇼트커트를 지향했다. 아들 둘 키우는 엄마가 긴 머리가 가당키냐 하나며 현실감 없는 남편을 나무랐다. 늘 보는 머리 모양이지만 이번에는 어딘가 조금 달라 보였다. 어디선가 본 듯한 스타일이었는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한참 고민하는데 아내가 이번 머리 너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미용실에서 골 때리는 그녀들에 나오는 FC 구척장신의 차수민 스타일을 만들어 주었다고 무척 좋아했다. 아무리 아내를 사랑해도 아닌 것 아니었다. 마침 그때 아내 머리 스타일을 어디서 보았는지 불쑥 생각났다. <한 지붕 세 가족>에서 "만수야!"를 외치던 세탁소 사장 최주봉 아저씨 헤어 스타일이었다. 머리에 떠오른 생각을 여과 없이 아내에게 직언했다. 실수였다. 아내의 여린 손바닥이 뒤통수에 와 꽂혔다. 등줄기가 서늘했다. "차수민 머리거든!"

<출처 : MBC 홈페이지 및 차수민 인스타그램 스크린 캡쳐>

골 때리는 그녀들에 푹 빠진 아내가 오늘 내 골을 강타했다. 요놈의 입이 방정이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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