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 좋아하세요?

3월 14일, 내 인생의 스포츠 - 농구 편

by 조이홍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에서 수영과 달리기(마라톤)가 수준급인 아내나 수영과 스키가 역시 수준급인 아이들에 비하면 나는 사람들이 '오!!!' 할 만큼 폼나게 잘하는 운동이 없다. 바닷가에서 아이들이 수영하는 모습을 본 몇몇 어른들은 가끔 아내나 내게 아이들이 수영 선수인지 물어볼 때가 있다. "그럴 리가요. 그냥 아이들이 물을 좋아해요."라고 대답하지만, 내가 봐도 아이들이 자유롭게 유영하는 모습은 정말 멋져 보였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영하는 아내를 보는 제삼자의 시선도 비슷했다. 아내가 다니는 수영장에 처음 오는 회원들은 아내를 수영 코치로 착각할 때가 종종 있다. 하긴 떡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근육, 지치지 않는 체력과 맵시 나는 자세까지 누가 봐도 수영 코치 모습 그대로이긴 했다. 그런 말을 듣고 온 날 아내는 유난히 기분 좋았다. 사실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의 공통점은 한때 '초콜릿 복근'을 가졌다는 점이다. 내가 그토록 꿈꾸었으나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王자 말이다. 왜 내 배는 염치도 없이 자꾸만 부풀어 오르는 걸까? 한때 내 몸도 한 날렵했었는데 말이지!


내 성장판은 야박하게도 내 의지와 달리 고등학교 때 닫혔다. 얼마나 매몰차게 성장 호르몬 수도꼭지를 잠갔는지 고2 이후로 단 0.1cm도 자라지 않았다. 하긴 내 몸이지만 내 뜻대로 되는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 작은 키도 볼록 나온 똥배도 휑한 머리도 결코 어린 시절 내가 바랐던 미래의 내 모습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천만다행인 것은 이런 나라도 사랑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아니고 무려 둘이나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 자신과 아내, 둘이면 충분했고 세상은 살만 했다. 평균 신장에 못 미치는 키에도 불구하고 내가 좋아하는 운동은 생뚱맞게도 '농구'였다. 친구들과 어울려 농구할 때면 머리 크기 하나 차이로 밑에서만 뛰어다니고 리바운드는 언감생심이었지만 왠지 농구를 무척 좋아했다. 당시 농구는 축구만큼 인기 스포츠였고 점심시간이면 자연스레 아이들이 축구파와 농구파로 갈렸지만 언제나 나는 반쪽짜리 농구 코트에 서 있었다. 대부분 남자아이들이 그렇듯이 국민학교 고학년부터 중학생 때까지는 축구를 했다. 공 하나 던져주면 흙먼지 폴폴 풍기는 운동장에서 몇 시간이나 뛰어놀았다. 냉정하게 말해서 그건 '놀이'였지 '운동(스포츠)'은 아니었다. 매사에 열심인 나는 축구도 무척 열심히 뛰었지만 들이는 품에 비해 평가가 매우 야박했다. 외부적인 평가도 그랬지만 스스로도 그랬다. 축구에는 영 소질이 없었던 것이다.


농구는 달랐다. 신장은 작지만 드리블과 인터셉트는 제법 잘하는 축에 들었다. 사실 키 작은 아이가 농구 코트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빠른 발과 드리블, 정확한 패스 능력이 필요한 '가드' 자리를 꿰차는 것이다. (적어도 길거리 농구에서는) 때론 작은 키가 유리하다고 말할 정도로 가드는 신장에 제한을 받지 않았다. 매일 흙먼지를 한 포대씩 마셔가며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끝에 포인트 가드 자리를 따낼 수 있었다. 포인트 가드는 농구 경기 중에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하며 팀을 리드하는 선수를 말했다. 상황 판단이 뛰어났던 나는 적재적소에 공을 공급해 동료들이 슛 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 주었다. 정말 꽤 괜찮은 포인트 가드였다. 굳이 말하자면 북산의 송태섭과 비견될만했다.


농구를 향한 열정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고등학생 때부터 대학생을 거쳐 직장인이 될 때까지 매번 농구 동아리를 만들었다. 고등학교 때 만든 농구 동아리 이름은 'C2B2(씨투비투)', 대학생 때 만들었던 건 '헐레벌떡', 그리고 회사 내에 만든 농구 동아리 이름은 '블루 웨일스(파란 고래들)'였다. 해당 시기마다 눈부시게 빛났던 청춘 몇 스푼쯤 갈아 넣은 소중한 동아리였다. 비록 C2B2는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해체되었고, 헐레벌떡은 과 농구 동아리에서 주전으로 뛸 수 없었던 2군 선수들을 모아 만든 탓에 학교 농구대회에서 단 1승도 올리지 못한 최약체 팀이었지만. 블루 웨일스는 조금 달랐다. 팀 마스코트 만들고 정식으로 유니폼도 제작했다. 주말마다 송파구에 있는 중학교 체육관을 빌려 연습도 했다. 직장인 농구 리그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지인들을 통해 정기적으로 다른 직장인 농구팀과 경기도 가졌다. 여름에는 강원도로 합숙 훈련도 떠났다. 그러나 아쉽게도 농구 인생의 황금기와 황혼기가 거의 동시에 찾아왔다. 야근과 야식과 음주에 찌든 몸이 결국 농구공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하루는 종로 YMCA 농구장에서 경기를 하는데 3분도 채 뛰지 못하고 감독님께 교체 사인을 보냈다. 생각 같아서는 마이클 조던처럼 자유투 라인에서 날아올라 림을 향해 슬램덩크라도 내리꽂을 것 같았지만, 현실은 볼 배급은커녕 드리블도 제대로 못하는 배 나온 아저씨였다. 게다가 체력은 어찌나 저질인지 이쪽 골대에서 저쪽 골대로 두 번만 왕복하면 하늘이 샛노랬다. 농구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미련 투성인 채로 보내기 싫었지만 초라한 몸은 더 싫었다.


사내아이를 키우는 아빠라면 으레 갖게 되는 로망이 있다. 야구는 못해도 캐치볼은 꼭 하고 싶고, 월척은 낚지 못해도 나란히 앉아 낚시도 하고 싶다. 내 경우에는 아이들과 함께 농구를 하고 싶었다. 아이들이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함께 농구하러 갔다가 리바운드되는 공이 첫째 아이 얼굴을 강타한 적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둘째 아이는 농구공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였다. 아빠의 욕심을 실현하기에 너무 이른 나이였다. 어린 시절 트라우마 때문일까? 이제 아빠만큼 자란 아이들과 '농구하러 갈까?' 하면 시큰둥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올코트 플레이는 못해도 아이들과 가볍게 몸 푸는 건 아직 자신 있는데 말이다! 게다가 아이들에게 알려줄 나만의(?) 농구 비법이 남아 있었다. "놓고 온다."와 "왼손은 거들뿐!"


아직은 폼나게 레이업을 하고, 다리 사이로 현란하게 공을 드리블할 수 있다. 이런 모습이라면 아이들이 "오, 아빠 멋진데!"라고 극찬할 게 분명하다. 자꾸 시린 무릎과 언제나 뻐근한 어깨가 언제까지 이런 초인적 능력을 발휘하도록 허락해 줄지 모를 일이다. 이번 주말에는 어떻게든 아이들을 설득해 동네 공원 농구장으로 농구하러 가야겠다. 한때 송태섭이었고, 한때 강동희였던 아빠의 진면목을 기여코 보여주고 말리라!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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