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수업
29살에 결혼을 하고 5년 만에 큰 아이 준이 태어났다. 딸 다섯에 아들 하나인 우리 집 사정 상 부모님께서 손주 욕심에 조바심을 내실만도 한데 내색 한번 안 하셨다. 딸만 둘인 처가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를 빨리 낳아야 한다는 생각도, 부담도 없었다. 그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신나게 결혼 생활을 즐기고 싶었다. 아이는 가능한 천천히 낳고 싶었다. 다행히 아내의 마음도 나와 다르지 않았다. 사실 내 마음 한편에서는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었다. 막연하지만 아이가 태어나면 더 이상은 내 삶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 앞에 놓이는 것을 싫어했다. 그 당시에는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내 삶에 어떤 의미일지 상상도 되지 않았기에 최대한 그 상황을 늦추고 싶었다.
그렇게 4년이라는 비교적 긴 신혼을 누리던 어느 날 문득 아이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기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전히 양가 부모님들은 손주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결혼 초에 약간의 미묘한 감정싸움이 있었지만 이내 집안의 패권을 거머쥔 아내의 뛰어난 리더십 덕분에 부부 관계도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우리에게 올 순간이라는 것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아내도 이즈음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우리는 아이를 갖기로 결정했고 그렇게 2007년 6월, 준이 태어났다.
준이 태어나고 엄청 후회를 했다. 우리를 닮은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이 이렇게 기쁘고 흥분되는 일인지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첫 아이를 안고 운다는 아빠들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나도 그 순간이 오니 울컥하는 감정을 추스를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 떨어졌다. 막 태어난 준은 콘 헤드에 외계인 같은 모습이었지만 정말 사랑스러웠다. 나보다 아내를 닮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게다가 준은 정말 천사 같은 아기였다. 태어난 첫날부터 잠도 잘 자고 보채지도 않았다. 수유 후 등을 몇 번만 토닥거려도 금방 커억 하고 트림을 했다. 품에 안고 있으면 금방 잠이 들었다. 신생아가 생기면 몇 달 간은 밤에 잠도 못 잘 거라고 주위에서 많이 이야기를 했는데 그럴 일이 별로 없었다. (물론 이건 아빠의 시점이고, 모유 수유를 했던 아내는 새벽 수유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내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최소한 목욕만큼은 직접 시켰다. 얌전한 준을 아기 목욕통에서 씻기는 것이 하루 중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조그만 손과 발을 보고 있으면 그냥 웃음이 나왔다. 준을 데리고 외출할 때도 아기 띠는 내가 맸다. 어린 시절 아기를 업고 가는 어머니들을 보면 그렇게 힘들어 보일 수가 없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짠했다. 그래서 아내에게는 절대로 준을 업지 못하게 했다. 물론 아내는 남편과 유모차를 적극 활용하는 사람이므로 딱히 업을 일도 없었다.
천사 같은 준의 활약으로 행복했던 집이 백 배는 더 행복해졌다. 그래서 아내에게 둘째를 갖는 건은 어떨지 조심히 물어보았다. 아내는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부모보다 형제가 훗날 더 의지가 될 것이라고, 준 혼자서는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너무 외롭지 않겠냐며 아내를 설득했다. 집요한 설득 때문인지, 아니면 준의 처지를 공감해서인지 아내도 둘째를 낳자고 했다. 그렇게 2010년 6월에 큐가 태어났다. 마침 큐가 태어날 즈음에 남아공으로 출장을 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아내는 준을 한번 낳아 봤으니 별거 아니라고, 남아공은 여행으로도 가기 쉽지 않은 나라이니 꼭 다녀오라고 했다. 출산이라는 것이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일이었기에 아내도 걱정되고, 또 큐의 일생에 딱 한 번뿐인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출장을 포기하고 (다른 동료가 대신 가는 것으로 하고) 함께 분만실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다. 아내는 가라고, 나는 안 가겠다고 옥신각신한 끝에 결국 내가 이겼다. 큐를 직접 받고 탯줄도 잘라 주었다. 몇 년 후에 아내는 그때 그냥 출장 갔으면 섭섭(?)했을 것 같다고 고백을 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 아니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뇌리를 스쳐갔다. 휴~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는 새벽 일찍 출근해 밤늦게 들어오는 일이 많아 깨어있는 아이들 얼굴을 보는 것이 일주일에 한두 번도 안되었다. 잠자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여전히 천사 같았고, 항상 아이들 볼에 뽀뽀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주말에도 출근하는 일이 많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최대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와 달리 일찍 퇴근해 집에 왔는데 아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아이 둘을 키우는 것, 특히 사내아이를 둘 키우는 것은 강철 체력 아내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내가 딱히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고, 나도 온통 마음이 아이들에게 가 있어 정작 아내의 상황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 날 이후로 가능하면 주말에는 아내 혼자만의 시간을 갖도록 하고 내가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 (정말 oo랜드에 많이 갔다) 적어도 주말에는 육아 스트레스로부터 아내를 해방시켜 주고 싶었다.
이제 준은 초등학교 6학년, 큐는 3학년이다. 여전히 잠자고 있을 때 아이들은 천사 같지만, 깨어 있을 때는 적어도 천사는 아닌 나이가 되었다. 행복했던 우리 집이 어느새 매일매일이 전쟁터가 되었으니 말이다. 사실 새벽같이 일찍 출근하는 내가 잘 몰랐던 거지 전쟁은 두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이미 시작되었다. 아이들 깨우는 것부터 시작해 아침 먹이기, 씻기기, 머리 말려주기, 촉촉한 피부 유지를 위한 크림 발라주기, 365일 자외선 차단제 발라주기 등 단계 하나하나 마다 아내의 잔소리가 없이는 진행이 되지 않았다. 큐는 늦게 일어나도 언제나 뜨거운 물에 20분 정도 몸을 녹여야 했고, 김이 서린 샤워부스 유리에 그림 한 편을 완성했다. 준은 뮤지컬 '영웅'을 본 이후로 학교 뮤지컬 동아리에 들어가 아침마다 영웅 주제가를 불렀다. 하도 많이 불러 성대결절이 왔는데도 멈추지 않았다. 뽀얀 피부가 너무 예뻤던 큐는 피부가 거북이 등껍질 같이 거칠어졌는데 크림은 바르지 않고 물기만 닦은 채 책에 빠져있기도 했다. 학교 갈 시간은 내 일이 아닌 것처럼 행동했다. 이런 상황이 몇 년 동안 반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일찍 출근하는 나는 미처 보지 못했던 현실이었다. 아내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혼자서 묵묵히 전장을 지켜준 전우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출근 시간이 오후로 조정되면서 나도 전장에 합류하게 되었다. 최신형 신무기(잔소리)를 갖춘 나의 합류로 아군은 전장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바쁜 아침 샤워 시간은 10분 이내로 하고, 아침 시간에 책이나 만화책 읽기는 금지했다. 샤워 후 촉촉한 상태로 크림 바르기, 마지막은 선크림 바르기로 등교 준비를 마무리하도록 했다.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때에는 좀 더 강력한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좋아하는 게임 삭제, 생일 선물은 사랑이 담긴 손편지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우리 마을에는 안 오시는 것 등으로 위협했다. 그러면 조금 효과가 있었다. 물론 위협만 한 것은 아니다. 달콤한 회유책도 있다. 일주일을 문제없이 잘 보내면 주말 저녁에 오락실 가기, 사격장 가기(큐가 사격을 엄청 좋아한다) 등. 나의 합류로 아침 시간은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골치 아픈 전장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준은 자기가 해야 할 숙제나 공부는 스스로 하는 편인데, 영혼이 자유로운 큐는 약간의 관리, 감독이 필요했다. 큐는 흥미가 없는 학교 수업에는 잘 집중하지 못했는데 문제는 대부분 과목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과학, 미술, 체육 정도가 예외였다. 그래서 대부분 과목을 학교 진도에 맞추어 복습을 시켜주어야 했다. 학원에는 보내고 싶지 않았다. 주말에 집중적으로 큐의 학교 공부를 전담하기로 했다. 물론 큐의 학교 성적은 나쁜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공부습관을 잡아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큐와 함께 공부를 해보니 여러 가지 문제가 포착되었다. 일단 문제를 풀 때 지문을 잘 읽지 않고 답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보기를 큰 순서대로 나열하라는 문제에 답을 하나 고른다거나, 누구일까요 라고 묻는 질문에 몇 개라고 답을 쓰는 것이었다. 서술형 문제에 답을 쓰는 것도 어려워했다. 계산 문제는 잘 풀지만 풀이 방법을 쓰는 방법도 어려워했다. 그래서 문제 하나하나를 같이 읽고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지 물어보고, 답을 작성하는 방법이나 글씨 크기까지도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시작은 항상 즐거운 분위기지만 공부를 하다 보면 어느새 큰 소리가 나고 화를 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심지어 이것도 모르냐고 머리를 쥐어 박기도 한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리라. 아이는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저 세상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평소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훈육이 필요하다면 인격적인 모멸감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체벌도 교육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는 이성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이론일 뿐이고 내 사랑스러운 아이에게는 결코 적용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에게 손을 대는 야만스러운(?) 짓은 미개한 사람이나 하는 거지 생각했던 나였는데 나도 똑같은 미개인이 되고 만 것이다. 나 자신이 참 한심해 보였다.
그래서 김나윤 작가의 <내가 너라도 그랬을 거야 / 김영사>를 읽었다. 소년 작가 전이수의 엄마이기도 한 김나윤 작가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겪었던 고민과 경험을 공유한 책인데 무척 도움이 되었다. 물론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또 버럭 화를 내곤 했지만 화내는 횟수를 줄이고 기다려 줄 수 있는 아빠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쉽지 않았지만 더 노력했다. 상대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 아닌가. 김나윤 작가는 <마음 읽어주기> 라는 북 콘서트에서 아이에게 화를 내는 것은 결국 아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말들만 늘어놓으며 자신의 화를 토해내는 무의미한 일이라고 했다. 그렇다. 아직 아이는 부모의 언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한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부모가 아이들에게 화를 낸다. 아마도 그 이유는 우리도 부모가 처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는 항상 옳은 생각을 하고, 옳은 방향으로 아이를 이끌어야 한다는 일종의 백점짜리 부모에 대한 집착 때문이 아닐까. 아이가 생겼다고 해서 갑자기 부모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게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도 함께 자라야 한다. 부모도 실수를 하고, 모르는 것도 많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부모로 성장해야 하지 않을까.내가 비록 부모지만 나도 불완전한 존재고 계속 배우는 존재니 실수투성이인 아이라도 그대로 사랑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지 않을까.
큐는 오늘도 아빠와 공부를 한다. 천사 같은 눈망울이 예쁜 아이다. 불쑥불쑥 솟아 오르는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 아이들 아기 때 사진을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두었다. 그리고 부모는 기다려주는 존재라는 것을 주문처럼 되뇐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결국 부모도 함께 자란다는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