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수업
최근까지 내 휴대폰에 저장된 아내의 이름은 '하늘 같은 싸모님'이었다. 일련의 사건으로 지금은 그냥 '싸모님'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그 위상은 하늘에 닿아있다. 학교 다닐 때 후배였던 아내를 '예쁘고 귀여워 내 마음에 쏙 드는'이라고 불렀다. 물론 학교 다닐 때 아내는 나 같은 남자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아내가 구해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여전히 솔로로 살고 있었을 것이다. 자존감이 낮은 편은 아니지만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고 한다. 솔직히 이성에게 나란 남자는 재미있는 친구일 뿐 남자 친구나 결혼 상대는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다. 복학을 하고 (외모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후배가 아내였다. 하지만 항상 남자 친구가 있던 아내와는 친한 선후배 관계 정도였다. 졸업을 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내가 먼저 연락해 가끔 만나 저녁도 먹고 영화도 보았다. 그렇게 1년을 연애 아닌 연애 같은 만남을 계속하다 결국 내가 먼저 고백을 했다.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통해 어렵게 사귀게 되었고 마음이 변할까 걱정되어 서둘러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솔직히 예쁨 예쁨 열매를 먹은 아내의 전 남자 친구들 이력은 화려했다. 그러니 결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할 수밖에.
그러나 결혼을 하고 허니문 기간이 끝나자 우리는 매일매일 싸우는 사이가 되었다. 싸우는 이유는 아주 사소한 것들로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왜 샤워를 하루에 두 번이나 해야 하느냐, 옷을 왜 매일 갈아입어야 하느냐 등등... 그때까지 평생을 자신의 방법으로 살아온 두 사람이 한 집에서 함께 살다 보니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 텐데 그때는 나도 자존심 때문인지 아내가 하라는 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다 한다. 심지어 소변도 앉아서 본다.) 그러다 보니 매일 싸울 일이 생겼고, 아내는 '너무 예쁘고 귀여워 내 마음에 쏙 드는' 존재에서 '꼴도 보기 싫은' 존재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한테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지? 왜 마음에 칼을 하나 두고 그 사람을 미워하고 아프게 하는 거지? 헤어지고 싶은 마음은 1도 없으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구나 싶었다. 너무 사랑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나는 그날 밤 아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상징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정말 물리적으로도 아내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이제 그대가 이 집의 가장입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뜻대로 하소서." 그때부터 휴대폰의 아내 이름이 '하늘 같은 싸모님'으로 바뀌게 되었다.
신기하게 이 날 이후 우리는 싸우지 않았다. 일 년에 한 번도 안 싸웠다. 그렇다고 아내가 절대군주 행세를 한 것도 아니었다. 우리에게 비로소 참된 행복이 찾아온 것이다. 내가 내려놓음으로 아내도 내려놓게 된 것이다. 누가 먼저인지 순서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가끔 결혼하지 않은 후배들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두 가지를 꼭 실천하라고 한다. 바로 역지사지(易地思之)와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라테 시켜 놓은 꼰대 같은데, 새겨 두면 평생 이로운 말이니 오늘만 참고 들어 주심 좋겠다)
역지사지는 본래 <맹자>의 <이루편>에 나오는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에서 비롯된 말로 '내가 만약 그러한 처지였으면 나 역시 그랬을 것이다'라는 뜻으로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측은지심 역시 <맹자>의 <공손추편>에 나오는 말로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뜻한다. 이 두 가지를 항상 마음에 두면 부부간에 다툴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직장 동료가 아내가 언제 가장 사랑스러운지 물어본 적이 있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잠들어 있을 때라고 대답했다. 동료는 엄청 웃었다. 뭔가 다른 말을 기대했나 보다. 사실 신혼 초부터 야근이 많아 퇴근하면 아내는 자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기다리기도 했는데 그때는 아내도 새벽같이 출근했기 때문에 기다리지 말고 자라고 했다. 잠자고 있는 아내를 보면 나한테 시집올 사람이 아닌데 고생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잘해주어야겠다는 마음이 저절로 들었다. 그래서 잠잘 때 가장 예쁘다고 말했던 것이다.
아내는 운동을 좋아한다. 신혼 초에 신제품 출시로 야근이 많아서 저녁 시간을 대부분 혼자 보냈다. 그런 아내가 걱정돼 헬스장 연간회원으로 등록해 주었다. 몇 개월 후에 배에 초콜릿 복근이 생겼다며 자랑했다. 아내는 정말 열심히 운동을 했다.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시작한 수영도 이제 제법 잘해 마스터스 대회 100m 접영에 출전해 동메달을 따기도 했다. 여자 접영 100m는 아마추어 수영인에게는 완주에 의미가 있다고 말은 하면서도 엄청 기뻐했다. 그런가 하면 용인마라톤대회 10km에 출전해 1시간 3분을 기록했다. 제대로 된 연습 몇 번 안 하고 뛴 기록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가끔 아내가 직업군인을 했다면 어땠을까 생각을 해 본다. 아마도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 장군이 나오지 않았을까? (찾아보니 2010년에 첫 여성 장군이 나오기는 했다.)
손재주도 많은 아내는 그림도 잘 그린다. 우리의 2nd Life를 위해 다시 그림을 그리면 어떻겠냐고 내가 제안을 했다. 나는 글을 쓰고 아내는 그림을 그리며 나이 들어 둘이 함께 그림책이라도 내자고 했다. 아내의 꿈도 실현하고, 현실적인 노후 대책으로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손재주가 있는 아내의 재능을 그냥 내버려 두기가 너무 아까웠다.
아내도 지금 꿈을 꾸고 있을까? 그 꿈은 어떤 꿈일까? 지금 나이에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별 실없는 소리를 다한다고 되려 나를 타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아내가 여전히 꿈을 꾸는 사람이면 좋겠다. 솔직히 나보다 재능도 많고 외모도 뛰어난 (아직 우리 사회는 외모도 중요한 경쟁력 중의 하나임을 인정한다) 아내가 조금 더 자신의 삶을 살기를 바란다. 아이들이 아직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때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시기이기는 하다. 하지만 내 아이의 엄마이기 전에 내가 가장 사랑한 사람으로서 아내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내 몫은 내가 감당하겠다. 아내도 자신의 꿈을 찾아 계속 나아가기를 바란다. 엄마(아빠)가 행복하지 않으면 아이도 결코 행복할 수 없다.
p.s : 이 글을 쓰고 고치기를 반복하는 과정 중에 아내는 성남시장배 철인3종 장거리수영대회에 출전했다. 무려 3.8km를 수영만 하는 경기다. 남녀 총 600여 명이 출전했는데 아내는 112위를 했다. 여성 선수 중에는 13위라는 대단한 기록이다. 아내는 오늘도 하루하루 성장해 가고 있다.
사족(蛇足) : <82년생 김지영> 책도 읽고 영화도 보았다. 이 책과 영화로 우리 사회가 매우 시끄럽다. 이 소란 속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다. 다만 사람들이 '공감능력'을 좀 더 크게 키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모두 김지영에게서 태어났고, 김지영과 사랑을 하고, 김지영을 낳기도 하며 이 고독한 별에서 함께 살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