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8일,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를 읽고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었다. 동양 사상에 대한 헤르만 헤세의 관심과 애정이 응축된 소설이라는 표지 문구처럼 '깨달음'에 대한 작가의 집요한 탐구를 미약하게나마 체득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 길지 않은 작품을 읽는 내내 불교 경전이나 '화두'를 대하는 듯했지만, 그중에서 유독 마음에 와닿는 부분이 있었다. 작품 속에서 싯다르타가 아름다운 여인 카말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 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부분이었다. 부유하게 자란 아들은 이전까지 아버지의 존재를 몰랐다. 어머니(카말라)가 뱀에 물려 사경을 헤맬 때 우연히 처음 만나게 된다.
싯다르타는 소중한 아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의 버릇없음, 고집불통에 대해 단 한 마디도 나무라지 않고 오로지 사랑으로 포용한다. 하루는 어린 아들이 밥그릇 두 개를 아버지(싯다르타)에게 던져 깨져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싯다르타는 한 마디 잔소리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뱃사공 동료이자 스승인 바주데바가 싯다르타를 다독이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누구나 한 번쯤 고민했을 문제에 대해 두 사람은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이 장면이 내게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독자분들과 나누어도 좋을 성싶었다. 특히 아직 어린 자녀를 두었다면 그 어떤 양육 관련 책보다 이 소설을 꼭 읽어야 할 터였다.
"친애하는 친구여, 한 번 말해 봐요. 당신은 당신 아들을 교육시키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 아이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 아이를 때리는 것은 아닙니까? 그 아이에게 벌을 주는 것은 아닙니까?"
"아닙니다. 바주데바, 나는 그런 일들은 하지 않습니다."
"나도 그것을 잘 알고 있어요. 당신은 그 아이에게 강요하지도 않고, 그 아이를 때리지도 않고, 그 아이에게 명령하지도 않아요. (중략) 그렇지만 당신이 그에게 강요하지 않고 벌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신 착각이 아닐까요? 당신은 그 아이를 사랑이라는 끈으로 묶어 구속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당신은 날마다 그 아이를 부끄럽게 만들고, 당신은 당신의 호의와 참을성으로 그 아이를 점점 더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당신은 그 아이에게, 바나나나 먹고 살아가는 두 늙은이의 오두막에서 살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늙은이들이야 쌀밥만 먹어도 별미라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생각이 그 아이의 생각일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요? 그 아이의 마음은 늙고 고요한 우리 늙은이들의 마음과는 아무래도 다르지 않을까요? 이런데도 그 아이가 강요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벌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싯다르타는 이미 자신이 경험한 많은 시행착오(사치스러운 생활, 쾌락과 권세의 늪 등)와 윤회의 소용돌이로부터 아들을 보호하고 싶었다. 자신이 저질렀던 수많은 과오를 아들이 되풀이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들을 곁에 두고 싶어 했다. 바주데바가 그런 싯다르타를 일깨워 주었다. 지난날 싯다르타를 윤회로부터, 죄업으로부터, 탐욕으로부터, 어리석음으로부터 지켜주었던 것은 아버지도, 스승들도, 지식도, 구도 행위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싯다르타가 스스로 깨달았기에 닿을 수 있었다. 이미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된 또 다른 스승 고타마 역시 싯다르타가 진리를 깨닫도록 가르쳐줄 수도, 도울 수도 없음을 알았다. 진리는 남에게 배울 수 없으며 오로지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임을 싯다르타도 잘 알았다. 그런 그도 자식 문제에서는 길을 잃고만 것이다. 결국 아들은 두 늙은이가 오래도록 모아둔 돈을 훔쳐 도시로 달아나고, 싯다르타는 아들의 뒤를 쫓다 멈춰 선다. 자신이 아들을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아들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걸 그 순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방목'이 양육 기조인 K형이 해준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이가 게임을 좋아하면 실컷 하라고 해. 게임하다 지쳐 더 이상 못하겠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아이가 탄산음료를 좋아하면 냉장고에 탄산음료를 가득 채워줘. 마시다 지겨워져 더는 마시지 않을 테니까."
<싯다르타>의 대목과 일맥상통했다. 역시 K형도 깨달은 존재였던가! 그렇다, 깨달음은 결코 남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깨우치기 전까지는 눈앞의 황금도 개똥으로 보일 터였다. 부모의 역할은 곁에서 보좌하는 것일 뿐 대신 살아줄 수도, 깨닫게 해 줄 수도 없다. 진리를 깨달았지만 마지막 최종 관문이 남았다. 앎에는 이르렀지만 실천의 문제가 남아 있다.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진리가, 깨달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번 주말에 냉장고를 탄산음료로 가득 채워 봐! 진짜 그렇게 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