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TV를 꺼버렸다

아내가 FC 아나콘다를 싫어하는 이유가 납득이 안 간다. 납득이...

by 조이홍

FC 아나콘다가 드디어 이겼다. 창단 13개월 만에 첫승이다. 9연패를 기록하는 동안 여섯 명 선수들이 숱하게 눈물을 흘렸는데 이번만큼은 기뻐서 울었다. 그녀들이 승리하는 장면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가슴이 몽글몽글해지더니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골 때리는 그녀들>에서 FC 구척장신과 함께 열렬히 응원하는 팀이었는데, 구척장신이 연승을 기록할 때도 아나콘다는 연패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설마 이번에는 이기겠지 했는데 번번이 패하고 말았다. 아나콘다는 늘 아픈 손가락이었고 그래서 더 마음이 쓰였다. 방송 말미 인터뷰에서 나미춘(윤태진) 선수가 "저희를 포기하지 않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울먹이며 말할 때 '1승 해 줘서 고마워, FC 아나콘다'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FC 아나콘다를 유난히 싫어하는 아내와 함께 TV를 시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방송 내내 FC 개벤져스를 응원했고, 아나콘다가 멋진 플레이를 선보일 때마다 한숨을 푹푹 쉬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지난 13개월 동안 아나콘다의 패배 순간들이 나온 후 드디어 감동적인 드라마가 나오려던 찰나, 아내가 리모컨을 들더니 덜컥 TV를 꺼버렸다. "이제 <골 때리는 그녀들> 안 볼 거야. 어떻게 아나콘다가 이길 수 있어!" 이게 왠 마른하늘에 날벼락….


아내는 FC 아나콘다를 정말 싫어했다. 축구하러 오면서 과하게 화장하는 게 싫다고 했고(뉴스 진행하고 온 거라고), 다른 팀들에 비해 노력하지 않는 것 같아서 싫다고 했고(얼마나 더 노력해야 하는데), 특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윤태진 선수의 플레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공을 뺏기거나 슛을 날린 공이 골인되지 않으면 다른 선수들에 비해 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나. 내게는 그런 공에 대한 집착과 열정이 멋져 보였는데 아내는 그게 그렇게 눈꼴사나웠나 보다. 내가 보기에 아내의 축구 스타일은 윤태진 선수의 플레이를 무척 닮았다. 축구에 대한 열정과 공에 대한 집착은 말할 것도 없고, 때로는 공보다 빠른 스피드도 비슷했다. 이를 악물고 끝까지 뛰는 악바리 근성도 닮았다. 내가 윤태진 선수를 좋아하는 이유도 아내와 닮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닮은 것 같다고 하면 주먹이 날아왔다. 개벤져스의 '적토마 선수'를 닮았다고 해도 주먹이 날아왔다.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고 했는데, 왜 홍시 맛이 나냐고 하다니….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라!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인 <골 때리는 그녀들>을 보지 않을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했다. TV에 관심 없는 아내도 매번 오늘 <골 때리는 그녀들> 하는 날인가 물어볼 정도니 말이다. 본 방송은 사수하지 못해 번번이 VOD로 다시 보기 하지만 그녀들의 축구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 부부를 설레게 했다. 때론 응원하는 팀이 달랐지만 지금까지는 맥주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이좋게 시청했다. FC 아나콘다가 첫승 하기 전까지는. 그래서 당분간 FC 아나콘다가 출전하는 경기는 혼자 보리라 마음먹었다. 승리를 맛본 가을 뱀들이 또다시 이기게 될 테니 말이다. 아내와 FC 아나콘다의 경기를 시청할 때, 군대 후임병 시절 내무반에서 프로야구 결승전을 시청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당시에 나는 베어스를 응원했는데 부산 출신 고참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롯데 자이언츠의 골수팬이었다. 불행히도 당시 내무반에는 부산 출신이 무척 많았다.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최종적으로 두산이 승리했고 군생활은 아주 잠깐이지만 무척 피곤해졌다. 남자는 평생 군대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없다더니 꿈이 아닌 현실에서도 내무반 필(feel)을 느끼기는 정말 오랜만이다. 불편한 마음으로 각 잡고 TV 보느니 차라리 소중한 시간에는 잠시 TV를 꺼두어도 좋겠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말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심심한 사과'에서 비롯된 MZ 세대 문해력 논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