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텐스 열 단어 소설
오늘 열 단어 소설은 어릴 적 유행했던 '최불암 시리즈'를 닮았습니다. 물론 그걸 겨냥하고 쓴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 싶습니다. 하지만 영감은 다른 곳에서 얻었습니다. 이미 제목만큼은 수백, 수천 번도 더 들어 봤지만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 난해한(이라고 쓰고 '지루한'이라고 읽는)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저자 마르셀 프루스트는 대작을 집필하기 전에 영국의 대문호 존 러스킨의 책을 두 권이나 번역한 '러스킨 빠'였습니다. 두 번째 번역서인 <참깨와 백합>을 출간할 때 쓴 역자 서문이 '독서에 관하여'라는 글인데 존경해 마지않는 러스킨에 반하는 프루스트의 독서에 관한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독서가 우리 인생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어, 이 환호성은 어디서 들리는 소리인가요? 둘째 아이의 잠꼬대였군요.
프루스트에 의하면 독서가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은 책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어디서, 무엇을 느끼며 읽었느냐에 따른 독자의 개인적인 의미라고 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책을 쓴 작가가 아니라 그것을 읽는 독자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죠. 같은 책이라도 독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프루스트의 독서론은 리스킨과 달리 매우 주관적이고 현대적입니다. 책을 쓴 '작가'보다 그것을 읽는 '나', 독자로서의 '나'가 더 중요하다는 프루스트의 의견에 동의하시나요? 책이라는 지식원, 외부 지식 저장고를 맹신하는 저에게는 제법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신영복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서삼독(書三讀)'과도 일맥상통하지만, 이보다 서너 걸음은 더 나간 듯합니다.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책(글)을 읽으면 우리 뇌는 눈으로 입력한 정보를 분석하고 기존에 가지고 있던 배경지식이나 경험, 추론이나 유추, 공감 같은 인지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 한 편의 영상으로 완성합니다. 글이 곧 머릿속에서 영화가 되는 셈이죠. 배경지식이나 경험, 그리고 인지능력은 사람마다 다를 테니 같은 책(글)을 읽어도 머릿속에 그려지는 장면은 다 다르게 펼쳐질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에게는 책이 재미있는 매체이고, 또 다른 누구에게는 졸린 매체인가 봅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독자 역할도 제법 중요한 것 같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자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려면 먼저 좋은 독자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독자가 되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겠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뱅글뱅글 도는 호랑이들이 생각납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모든 책은 종착역이 아니라 출발역이라는. 좋은 독자는 읽은 책에서 반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야 합니다. 책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책부터 읽어야겠죠. 이것도 또 뱅글뱅글 돕니다. 신밧드처럼 해박하고 현명한 존재가 되기 위해 책으로 변할 필요는 없습니다. 좋은 독자로서 신밧드가 됐어야 했는데, 그는 영리한 독자는 아니었나 봅니다. 오늘 글은 참 두서없습니다. 졸린 것도 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아, 글에 취했나 봅니다. 자기 글에 취하다니 오늘은 저도 좀 별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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