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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에…

수줍음 많고 말 없는 한 청년 이야기

by 조이홍

"아빠, 잠이 안 와요. 옛날 이야기해 주세요."

"그럴까? 오늘은 우리 해이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얘기요. 용감한 청년 이야기!"

"또? 너무 자주 해서 외울 정도잖아. 그 이야기가 그렇게 재밌어?"

"네, 언제 들어도요."

"그래, 그럼 오늘은 해이한테 한 번도 들려주지 않은 이야기를 해 줄게. 잘 들어 봐. 옛날 옛날에…."




수줍음 많고 말 없는 한 청년이 있었어. 어려서부터 책 읽고 생각하길 좋아했지. 해이처럼 말이야. 훌륭한 학자가 되고 싶어 했어. 그런데 덜컥 이웃나라에 나라를 빼앗기는 일이 벌어진 거야. 온 백성이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지만 청년은 마냥 길을 잃고 헤맬 수만은 없었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했지. 나라를 빼앗긴 청소년들이 스스로 배우고 익혀 제 몫을 해내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한 청년은 야간학교를 설립했어. 맞아, 선생님이 된 거야.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도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풀리지 않던 청년은 몇몇 동지들과 뜻을 모아 나라를 통째로 이웃나라에 내준 다섯 명의 나쁜 놈들 중 우두머리를 처단하기로 마음먹었어. 개미 한 마리 죽이지 못하는 여린 사람이었지만 조국을 위해 결심한 거야. 안타깝게도 대담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어. 나쁜 놈 우두머리는 운이 참 좋았지. 청년은 동지들과 함께 형무소에 수감되었단다. 스무 살도 안된 나이였어. 3.1 만세운동으로 상해에 임시정부가 만들어졌어. 조국의 독립을 우리 손으로 이루기 위해 뜻있는 사람들이 모인 거지. 감옥 생활을 마친 청년은 국내에서 임시정부 돕는 일을 했어. 독립신문을 배포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로 보냈지. 독립운동에 뜻이 있는 동지들을 모으기도 했어. 그러다 다시 체포되어 또 4년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어. 비록 몸은 좁은 감옥에 갇혀 있지만, 마음은 국경을 넘어 멀리멀리 뻗어나갔단다. 수감 생활을 마치자 이번에는 상해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어. 그리고 마침내 조국 광복을 이룩한 거야. 청년은 이제 머리 희끗한 중년의 사내가 되었지만 한평생 바친 일이 빛을 본 것만으로도 감사했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지.


나라를 되찾은 기쁨도 잠시 전쟁이 터졌어. 온 나라가 폐허가 됐지. 기나긴 전쟁이 끝나고 허리가 잘린 나라는 두 개로 나뉘어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단다. 자유를 품은 나라는 빠르게 전쟁의 상처를 회복해 나갔지. 그리고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조국 광복에 기여한 독립운동가를 찾았지. 늦었지만 그분들의 노고에 보답하려고 말이야. 머리가 희끗해진 청년은 나라에서 준다는 훈장을 받고 싶어 하지 않았어. 왜냐고? 나라 잃은 백성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믿었으니까. 동지들은 조국 해방도 보지 못하고 먼저 스러져 갔는데 무슨 염치로 훈장을 받을 수 있냐는 거였지. 청년을 설득한 거 현명한 아내였어. 아내는 자식들과 그 자식의 자식들이 청년이 한평생 몸 바친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오래도록 가슴에 새기기를 바랐어. 그 말에는 청년도 더 이상 고집부릴 수 없었어. 자고로 남자는 여자 말을 들어야 하는 법이란다. 결국 건국훈장을 받게 되었지. 누군가는 나라를 내주는 데 앞장서고, 또 누군가는 독립운동하는 사람을 체포하는 데 혈안이 되었지만 그 죗값을 제대로 치른 사람은 거의 없었어. 모든 게 뒤죽박죽인 시대였으니까. 어쩌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람은 청년처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사람이 아니라 그 반대편에 있던 사람들일지도 몰라. 누군가 기억하지 않으면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생기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테니 말이야.




"아빠, 그런데 훈장이 뭐예요?"

"어, 우리 집에도 하나 있는데, 해이가 아직 보지 못했나?"

"정말, 우리 집에 훈장이 있어요?"

"그럼, 이제 코 자면 내일 아빠가 보여줄게. 잘 자, 우리 딸."

"아빠도 안녕히 주무세요."

건국훈장 독립장.jpg <이미지 출처: 대한민국 상훈 홈페이지>


아내의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셨습니다. 대한민국 독립에 기여한 바를 인정받으시고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으셨지요. 위 이야기는 사실에 근거했답니다. 할아버님이 독립운동하셨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두 가지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는 우리 집(본가)에는 왜 독립운동가가 없을까였습니다. 독립운동가는 고사하고 그 시대에 돌아가신 분도 없으니 뭔가 꺼림칙했습니다. 기분 탓이었을까요? 다른 하나는 일제강점기를 살았다면 할아버님처럼 독립운동가가 될 수 있었을까였습니다, 행여 친일파가 되지는 않았을까 스스로 묻고 또 물었습니다. 누가 머릿속을 훔쳐보는 것도 아닌데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 독립운동가가 되었을 거야."라고 대답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건국훈장울 받지 못한 수많은 이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는 지금 모습과 많이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정부가 3자 변제 방식의 강제징용 피해배상 해법을 발표했습니다. 이번에도 가해 당사자와 피해 당사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잘못한 이가 사과하는 것이 보편적 가치입니다. 사과를 받아야 할 피해자 할머니들은 정부가 어느 나라 정부인지 따져 묻습니다. 피해자의 의견이 배제된 해법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기에 훈장을 받지 않겠다고 고집부리시던 할아버님 뵐 면목이 없습니다. 가슴이 답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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