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빨리 나온 새싹이 불편했다

한 평 텃밭을 너무 일찍 찾은 손님들에 관한 짧은 생각

by 조이홍

이별 장면에선 항상 비가 오는 것처럼 언제나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텃밭은 싸늘했다. 부지런한 이웃 텃밭에 찾아온 파릇한 봄은 아직 한 평 텃밭에는 강 건너 봄소식이었다. 씨앗 포장지 뒷면을 다시 확인해 보니 상추 씨앗이 발아하는 기간은 '파종 후 1~2주'라고 되어 있었다. 마음이 급했는지 1~2주를 '1주'로 넘겨짚었다. 사실 발아 기간은 1주보다 2주가 더 현실적이었다. 탐욕이 진실을 삼켰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두 눈을 부릅뜨고 텃밭을 째려보았다. 아이 손톱만 한 새싹들이 텃밭 군데군데를 물들였다. 그럼 그렇지! 어디에나 성격 급한 녀석들이 있을 터였다. 새봄이 무척 궁금해 빼꼼히 고개를 내민 '미라클 모닝'스러운 씨앗들 말이다. 알을 깨고 나온 새처럼 단단한 껍질을 뚫고 돋아난 새싹들이 대견했다. 꽉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였다. 환호성이라도 내지르려던 찰나 뭔가 좀 어색했다. 이상했다. 녀석들 정체가 발아한 새싹들이 아니라 잡초라는 걸 눈치채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한 평 텃밭러의 사계절 '싹트기까지 짜릿한 기다림이란 없다' 중에서)


지난주 일요일 느긋한 마음으로 텃밭에 쌈채소 씨앗을 뿌렸다. 지난해에는 소박한 밥상을 지향하며 '한 평 텃밭러의 사계절'이라는 농사 에세이를 쓰느냐 절기도, 흙도, 사진도, 심지어 지렁이까지 신경 써야 했는데 올해는 이런저런 욕심부리지 않기로 작정해 마치 한 마리 나비 꿈을 꾼 장자라도 되는 양 여유로웠다.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가지 않으면 그만이니 텃밭이 그곳에 있어도 그곳에 있지 않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김연수 작가가 단편 <진주의 결말>에서 "우리가 달까지 갈 수는 없지만 갈 수 있다는 듯이 걸어갈 수는 있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이치일 터였다. 오늘 아침, 날이 유난히 좋아 텃밭에 갔다. 지난해 뼈저리게 느낀 교훈(위에 인용한 글)도 있으니 새싹과 만나리라는 헛된 기대는 품지 않았더랬다. 그저 요 며칠 푹푹 찌는 날씨 탓에 애타게 목말라할 씨앗들에게 시원한 생맥주, 아니 생수 한 잔 권할 참이었다. 그런데 웬걸, 파종한 대로 쌈채소 새싹들이 줄 맞춰 파릇파릇 돋아나 있는 게 아닌가! 어찌나 반가운지 땅바닥에 코를 박고 입이라도 맞출 듯했다. 이게 머선 129?


씨 뿌린 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6일. 그런데 벌써 여기저기에 또렷한 푸르름으로 한 평 텃밭을 물들였다. 쌈채소 새싹들이 틀림없었다. 용맹한 군인들이 제식 훈련하는 것처럼 나란히 나란히 줄도 맞췄다. 어찌나 질서 정연한지 코끝이 찡했다. "아이고 내 새끼들 얼마나 목이 말랐을고…." 재빨리 물뿌리개에 물을 가득 담아 회색빛이 감도는 마른땅에 시원한 비를 내려주었다. 누군가 한 번은 정 없다고 하니 한 번 더, 두 번으로는 부족해 보여 한 번 더. 모두 세 차례 물을 뿌리니 텃밭이 흥건했다. 산림청에서 보낸 건조한 날씨로 산불재난 국가위기경보 '경계' 단계를 발령했다는 재난 문자도 한몫 거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예년보다 덥고 건조한 날씨가 신경 쓰였다. 혹시 이것도 기후 변화 탓인가? 근심은 걱정을 낳고, 걱정은 다시 불안을 낳았다. 한 주나 먼저 만난 쌈채소 새싹들을 마냥 기분 좋게 바라볼 수만은 없었다. 개화 시기가 다소 겹쳐지기는 해도 목련-개나리-벚꽃 순으로 피던 봄꽃들이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렸다. 햇볕이 잘 드는 일부 지역에 한해서지만, 화려한 봄꽃들 역시 마음 편히 구경할 수 없었다. 서울을 기준으로 개나리는 3일, 진달래는 6일, 벚꽃은 5일이나 개화시기가 빨라졌다. 역시 지구온난화가 문제였다.

KakaoTalk_20230401_235920004.jpg
KakaoTalk_20230401_235920004_02.jpg
KakaoTalk_20230401_235920004_01.jpg

제주 근해에 서식하던 토종 어종들이 점점 사라지고 아열대 어종들이 자주 발견된 지는 벌써 오래전 일이다. 그중에는 파란 고리 문어처럼 맹독성 어종도 있다. 물론 '니모' 같은 귀여운 아열대 어종도 있지만 말이다. 이것도 역시 기후 변화에 따른 지구온난화의 영향 때문이다. 사실 새싹 발아 기간이 짧아지고 어종들이 달라지는 건 그다지 문제 되지 않는다. 다소 혼란스럽겠지만 긍정적인 측면도 없지 않을 터였다. 애석하게도 장점은 이 정도가 전부다. 좋지 않은 점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 궁금해 미칠 지경인 분들은 마크 라이너스의 <6도의 멸종>이라는 책을 찾아보기를 권한다. 우리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


김연수 작가의 단편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는 가상의 소설 <재와 먼지>가 나온다. 사랑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안 연인은 서로의 세계가 겹쳐지지 않는 각자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동반자살을 선택한다. 그 직후 두 사람은 두 번의 삶을 더 살게 된다. 두 번째 삶은 시간이 거꾸로 흘러간다. 동반자살을 선택하기로 한 날이 새로운 인생의 첫날이 되고 날마다 어려지는 것이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현실에서 두 사람은 처음 만났던 순간이 얼마나 설레고 기뻤는지 깨닫게 된다. 그걸 깨닫는 순간 세 번째 삶이 시작된다. 이제 그들은 '미래'를 안다. 미래를 기억하며 설레고 기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된다. 지구 평균 기온이 3℃ 오른 세상, 그 세상이 어떤지 안다면 우리는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게 될까? 소설 같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다행히 지혜로운 인류는 과학적 사실을 토대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것이 지구가 인류를 지혜로운 종으로 진화하게 해 준 까닭이 아닐까? 미래를 기억하면 우리도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1분과 영원(永遠), 그리고 불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