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sh, '밀다'라는 뜻이다. 우리가 이 단어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은 '문'이다. Pull, '당기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 역시 '문'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교육열과 교육 수준으로 치자면 OECD 국가들 중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영어 단어가 Push와 Pull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Push라고 쓰여 있는데 당겨 여는 사람, Pull이라고 쓰여 있는데 밀어 여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쉬운 단어를 읽지 못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전생에 청개구리였기 때문일까? 왜 현명한 사람들조차 슬기롭게 행동하지 못할까?
어쩌면 '문' 자체에 문제가 있는지도 모른다. 대부분 문이 Push나 Pull이라고 쓰인 것과 상관없이 양쪽 방향으로 열리기 때문이다. '문'의 기능은 원활한 흐름, 소통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그동안 문을 열었던 방식으로 문을 연다. 당연한 말이다. 우리는 그걸 습관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Pull이라고 쓰여 있는지, Push라고 쓰여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그런 단어가 문에 쓰여 있었던가 반문할지도 모른다. '관성의 법칙'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사람은 이동하는 방향으로 계속 나가려는 성질이 있어 당기는 것보다 미는 것을 훨씬 선호한다. 게다가 건축물 피난 및 방화 기준 규칙 제11조 2항에 따르면, '문화 및 집회시설, 종교시설, 장례식장 또는 위락시설의 건축물은 당기는 문을 출구로 사용할 수 없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위기 상황에서 급하게 건물을 빠져나와야 하니 당연히 미는 것이 당기는 것보다 0.1초라도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당겨 여는 문'은 도대체 왜 있는 걸까, 어떠한 사회적 이점이 있는 것일까?
사실 문제는 '문'에 있지 않다. 사람에게 있다. '문'에는 오히려 깊은 뜻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 단 하나의 장점도 없는 '당여 겨는 문'이 필요한 까닭은 바로 바쁜 일상에 쉼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양성도 한몫한다. 모두가 밀어서 문을 연다면 사회는 획일화된다, 재미없어진다. 가속화된다. '빨리빨리' 문화는 단 시간 내에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루게 했지만, 여러 가지 부작용도 낳았다.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멈춰야 비로소 보인다"라고. 당겨 여는 문의 진짜 속내는 다양성을 확보하고 바쁜 현대인들이 문을 여는 순간만이라도 잠시 여유를 갖자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문'을 탓하지 말자. '문'에는 정말 깊은 뜻이 담겼다.
호모 사피엔스, 슬기로운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람은 생각보다 슬기롭지 않다. 따라서 이 글은 제목부터 잘못되었다. 슬기롭지 않기 때문에 어리석게 행동하는 것이다. 대신 인간은 반성과 참회를 할 줄 알고, 다음에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것이 슬기로운 사람의 진짜 의미일 터였다.
누군가를 지적하려는 게 아니다. 딱 내가 그랬다. 얼마 전 백화점에 들렀다 아랫배가 살살 아파 화장실에 들렀다. 일을 마치고 물 내림 버튼을 지그시 눌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순간 등줄기가 서늘했다. 망가진 건가, 민망한 상황이 내게 일어난 건가!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냥 나가야 하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물 내림 버튼 표시 밑에 화살표를 보지 못한 것이다. 저렇게 큰 화살표를 말이다. 지금까지 누른 것은 물 내림 버튼이 아니라 물 내림 버튼이라고 쓰인 안내문구였던 것이다. "뭐, 이렇게 친절한 필요가 있어?"라고 툴툴 거리며 진짜 물 내림 버튼을 눌렀다. 물이 용틀임하며 시원하게 내려갔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생각보다 현명한 사람이 아니었구나…. 멈추니 비로소 보이는구나. 바쁜 일상에 쉼표가 되어준 '물 내림 버튼 안내 문구'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재빨리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누가 보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민망해하면서….